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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가 사흘 동안 끊기면 그냥 불편한 정도겠지, 싶었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책을 30분쯤 읽다 보니 그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석훈 작가의 장편소설 《당인리》는 전국 대정전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통해, 우리가 얼마나 전기 하나에 모든 것을 걸고 사는지를 냉정하게 해부합니다.



전국정전, 실제로 가능한 이야기인가

어렸을 때 시골집에서 정전을 꽤 자주 겪었습니다. 촛불을 켜놓고 언제 불이 돌아올지 기다리던 그 시간은, 사실 그리 무섭지 않았습니다. 우리 동네만 이런 거고, 어딘가에서 수리 중이라는 믿음이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이 소설은 그 전제 자체를 무너뜨립니다. 수리해줄 곳 자체가 사라진 상황을 그리고 있으니까요.

소설의 발단은 한국전력공사 본사가 위치한 나주에 대규모 지진이 발생하면서 시작됩니다. 핵심은 단순한 지진 피해가 아닙니다. 지진과 함께 중앙급전소가 붕괴됩니다. 여기서 중앙급전소란 전국의 전력 생산과 송전을 실시간으로 제어하는 국가 전력 시스템의 중추 기관을 말합니다. 이곳이 무너지면 전국 각 시·도는 서로 연결이 끊긴 채 고립됩니다.

이게 허구처럼 들리지만 사실 우리나라 전력 시스템 구조상 충분히 현실적인 시나리오입니다. 유럽은 국가 간 송전망이 연결되어 있어 한 나라가 전력 위기를 맞으면 인접국에서 끌어올 수 있습니다. 일본은 지자체별 전력 자급 구조가 어느 정도 갖춰져 있습니다. 반면 우리나라는 중앙 집중형 전력 공급 구조입니다. 한 지점이 뚫리면 전체가 흔들리는 구조입니다. 소설은 이 구조적 취약점을 정면으로 건드립니다.

전계통 정전(Blackout), 즉 대한민국 전역에 전기 공급이 동시에 끊기는 상황이 벌어지면 복구에 얼마나 걸릴까요. 작가의 표현을 빌리면 한마디로 "답 없다, 복구 불가능하다"입니다. 제가 이 문장을 읽었을 때 솔직히 등이 서늘해졌습니다. 과장이 아니라 시스템 설계상 그렇다는 겁니다.

  • 한국: 중앙 집중형 전력망 — 나주 중앙급전소 붕괴 시 전국 동시 마비 가능
  • 유럽: 국가 간 송전망 연결 — 한 국가 위기 시 인접국에서 전력 지원 가능
  • 일본: 지자체별 분산형 전력 자급 구조 일부 적용
요약: 우리나라의 중앙 집중형 전력 구조는 나주 중앙급전소 하나가 무너지면 전국이 동시에 마비되는 치명적 취약점을 안고 있다.

에너지자립, 왜 정치에 막혔나

소설의 핵심 무대는 서울 마포구 합정동 인근에 실제로 존재하는 당인리 발전소입니다. 유사시 서울 예비 전력의 20퍼센트를 담당할 수 있게 설계된 비상 시설입니다. 서울시는 2017년 서울남부정전 사건을 계기로 이곳에 에너지 자립 구조 설계를 의뢰했습니다. 그런데 이 프로젝트는 결국 해체됩니다. 원인은 기술적 실패가 아니라 정치적 모략이었습니다.

분산형 에너지 자립이란, 전력 공급을 중앙 한 곳에 의존하지 않고 지역별로 독립적인 발전과 공급 체계를 갖추는 방식을 말합니다. 서울시 구청 25개마다 각자 수요를 감당하는 LNG 발전소를 만들고, 최종적으로는 태양광·풍력 같은 재생에너지로 완전 자립하는 그림이었습니다. 제가 읽으면서 '이건 꽤 합리적인 계획인데?' 싶었습니다.

그런데 소설 속 국정감사 장면은 현실 그 자체처럼 느껴졌습니다. 국회의원이 "전력 시스템이 불안하다느니 블랙아웃이 온다느니 하는 게 국민 협박"이라며 책상을 칩니다. 원전을 줄이기 위한 자리싸움으로 몰아붙이고, 한성판윤 역모라는 표현까지 씁니다. 실무자들이 시스템 붕괴 가능성을 설명하는데, 정치인들은 그걸 정치 공세로 뒤집어씌웁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씁쓸함을 감추기 어려웠습니다.

소설 속 대사 하나가 계속 머릿속에 맴돕니다. "정치는 옳고 그른 게 아니라, 명분을 만드느냐 못 만드느냐 이게 전부야." 재난 수습보다 명분이 먼저인 구조는 참 이상하지만, 현실에서도 종종 일어납니다.

작가 우석훈은 에너지관리공단 근무 경력과 국책사업 관여 이력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소설의 기술적 묘사는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제도와 조직을 직접 겪은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밀도를 갖고 있습니다(출처: 교보문고 도서 소개).

요약: 기술적으로 가능했던 에너지 자립 프로젝트가 정치 논리에 의해 해체되는 과정이 이 소설의 진짜 핵심 갈등이다.

재난소설이 남긴 현실적 질문들

소설에서 전국 대정전이 벌어지자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하나씩 따라가다 보면, 머릿속이 복잡해집니다. 신호등이 꺼져 도로가 마비됩니다. 고층 아파트 엘리베이터가 멈춰 고립된 주민들이 촛불을 켜다 화재가 납니다. 소방차는 출동했지만 소화전 펌프에 전기가 없어 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병원에서는 평소라면 간단히 치료했을 환자들이 죽어 나갑니다. 청와대는 유일하게 전기가 공급되는 제주도로 탈출합니다. 6·25 이후 처음 있는 일이라고 소설은 씁니다.

저는 이 장면들을 읽으면서 어릴 적 정전났을 때, 엄마를 떠올렸습니다. 저는 어려서 형광등 불빛만 전기로 돌아간다고 생각했지만, 엄마는 아마 세탁기부터 냉장고 속 음식들까지 머리가 복잡하셨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 회사도 떠올렸습니다. 회사의 모든 시스템은 전기로 돌아갑니다. 서버, 통신, 출입 보안, 냉난방 전부. 심지어 회사에 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신호등이 없는 도로는 이미 마비 상태니까요. 이건 현대 사회에서 발생 가능한 재앙 중 가장 전면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소설이 제시하는 희망의 방향은 무엇일까요. 바로 송도-목동-당인리를 잇는 송전 라인 복구 작전, 이른바 '대한민국 파워 리부팅'입니다. 계통 연계란 두 개 이상의 전력 시스템을 주파수와 위상을 맞춰 동시에 연결하는 기술적 작업을 말합니다. 헤르츠 수치가 59헤르츠 밑으로 내려가면 계통 전체가 탈락한다는 소설 속 묘사는 실제 전력망 운용의 임계 수치를 그대로 반영한 것입니다. 이현주 팀장이 무전기를 들고 "목동 나오세요, 지금 계통 들어갑니다"를 외치는 장면은 이 작은 기술적 복구 하나가 얼마나 큰 무게를 가지는지를 실감하게 합니다.

재난 자체보다 재난을 수습하는 과정이 이 소설의 진짜 몸통입니다. 제가 읽으면서 계속 생각한 건, 이건 기술 소설이 아니라 조직 소설이고 사람 소설이라는 점이었습니다. 뿔뿔이 흩어졌던 팀원들이 다시 모이고, 정치에 짓밟혔던 사람들이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시스템을 되살리려 한다는 것. 그 과정에서 연대라는 단어가 구호가 아니라 실제 장면으로 펼쳐집니다.

한국전력공사의 발전 자회사 구조와 분산형 에너지 정책에 관한 논의는 국내에서도 꾸준히 이어져 왔습니다(출처: 산업통상자원부). 소설은 그 제도적 논쟁을 인물과 사건 속에 녹여, 독자가 어느 순간 전문 보고서보다 더 선명하게 구조를 이해하게 만드는 독특한 효과를 냅니다.

요약: 《당인리》는 재난의 공포보다 그것을 극복하려는 사람들의 연대를 중심에 두며, 기술·제도·정치가 얽힌 현실을 소설 언어로 가장 선명하게 전달한다.

자주 묻는 질문

Q. 《당인리》는 실제 장소를 배경으로 한 소설인가요?

A. 네, 맞습니다. 서울 마포구 합정동 인근의 당인리 발전소는 실제로 존재하는 시설입니다. 유사시 서울 예비 전력의 20퍼센트를 담당할 수 있도록 설계된 비상 시설로, 소설은 이 실제 공간을 거점으로 삼아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덕분에 소설 속 묘사가 공상이 아닌 현실적인 질감을 가집니다.


Q. 전국 대정전이 실제로 한국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있나요?

A. 가능성이 완전히 없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우리나라는 중앙 집중형 전력망 구조로, 나주의 중앙급전소처럼 핵심 노드 하나가 붕괴되면 전국 단위의 전계통 정전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유럽이나 일본과 달리 국가 간 또는 지자체 간 분산 공급 구조가 갖춰져 있지 않다는 점이 핵심 취약점입니다. 재난은 항상 여러 우연이 겹칠 때 발생한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Q. 우석훈 작가는 왜 이 소재로 소설을 썼나요?

A. 작가는 에너지관리공단 근무 경험과 다양한 국책사업 관여 이력을 갖고 있습니다. 2011년 순환정전 사태를 직접 겪고 그 공포를 잊지 않은 채 10여 년을 지나, 현재의 법·제도·기술 구조 안에서 그 재난이 재현된다면 어떤 모습일지를 소설로 풀어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88만원 세대》 등 사회 문제를 정면으로 다뤄온 그의 작업 방식이 소설에서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Q. 전문 지식이 없어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나요?

A. 제 경험상 충분히 읽힙니다. 전력망이나 에너지 정책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어도, 소설은 이현주·강선아·한정건 같은 인물들의 감정과 선택을 통해 기술적 내용을 자연스럽게 전달합니다. 오히려 전문 용어들이 등장인물의 긴장감과 맞물려 몰입도를 높여주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두세 시간이면 완독 가능한 속도감 있는 소설입니다.


결론

《당인리》를 다 읽고 나서 한동안 멍하게 있었습니다. 이건 재난 소설이기도 하지만, 결국 '우리는 왜 알고도 대비하지 못하는가'를 묻는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술은 있고, 사람도 있고, 방법도 있는데, 그걸 막는 건 늘 명분을 앞세운 정치였다는 이야기. 씁쓸하지만 외면하기 어려운 현실입니다.

재난 소설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물론이고, 에너지 정책이나 한국 사회의 조직 문화에 관심 있는 분께도 권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지금 살고 있는 이 나라의 전기가 어떻게 흘러오는지 한 번쯤 생각해보고 싶다면 이 소설이 꽤 좋은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참고: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8317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