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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서의 짧은 체류 (희망고문, 무한도서관, 호러소설)

매주 로또를 삽니다. 당첨 확률이 814만 분의 1이라는 걸 알면서도 손이 갑니다. 가능성이 0%가 아니라는 것, 그 한 가지 이유만으로 포기가 안 됩니다. 『지옥에서의 짧은 체류』를 읽으면서 그 기분이 떠올랐습니다. 이 소설의 지옥은 불도 없고 고통도 없습니다. 대신 탈출구가 딱 하나 있고, 그 가능성이 0이 아닙니다. 그래서 더 무섭습니다.희망고문: 가능성이 0이 아닐 때 더 잔인한 이유이 소설의 지옥 탈출 조건은 단순합니다. 우주 규모의 도서관 어딘가에 꽂혀 있는, 내 인생을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기록한 단 한 권의 책을 찾아 반납 슬롯에 넣으면 됩니다. 여기서 핵심은 이 도서관이 '무한'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무한이란 끝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뜻하는데, 이 도서관은 그렇지 않습니다. 끝이..

카테고리 없음 2026. 9. 14. 21:12
셸리 숍앤센터 (바디 호러, 한국소설, 타자성)

귀엽다는 감각이 과연 절대적인 것일까요. 제가 어릴 때 장터에서 본 강아지는 뾰족한 주둥이에 아기 늑대 같은 얼굴이었는데, 그게 너무 귀여워서 한참을 들여다봤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설재인의 소설 『셸리 숍앤센터』를 읽고 나서야 그 감각이 얼마나 조건화된 것인지 새삼 의심하게 됐습니다. 버려진 인체 기관들을 이어 붙여 만든 반려동물 '프랑'이라는 설정은, 읽는 내내 불편하면서도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바디 호러가 불편한 이유바디 호러란 신체의 변형·훼손·해체를 공포의 핵심 기제로 삼는 장르입니다. 여기서 바디 호러란 단순히 내장이 튀어나오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당연하게 여기는 몸의 완전성과 경계가 무너지는 데서 오는 근원적 불안을 자극하는 서사 전략을 뜻합니다.『셸리 숍앤센터』에서 ..

카테고리 없음 2026. 9. 13. 09:52
용의자 X의 헌신 (완전범죄, 천재대결, 미스터리 소설)

나오키상(일본 순수문학 최고 권위의 문학상)을 수상한 추리소설이 미스터리보다 로맨스에 더 가깝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용의자 X의 헌신』은 살인사건을 다루면서도, 책을 덮은 뒤 오래도록 남는 건 트릭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었습니다.완전범죄, 수학 천재가 설계한 알리바이의 구조이 소설의 핵심은 알리바이 트릭입니다. 여기서 알리바이 트릭이란 범행 시간대에 용의자가 다른 장소에 있었음을 증명하는 장치를 말하는데, 이 소설은 그 개념 자체를 비틀어버립니다. 쉽게 말해, 경찰이 풀어야 할 문제를 처음부터 잘못 설정하도록 유도하는 방식입니다.고등학교 수학교사 이시가미는 대학 시절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라는 평을 들었던 인물입니다. 그가 설계한 알리바이는 단순히 모녀의 행동을 맞추는 수준이 아니..

카테고리 없음 2026. 9. 10. 07:30
눈알이 제일 맛있단다 (K-호러, 편견, 복수)

솔직히 말하면, 저는 이 책 제목을 처음 봤을 때 그냥 지나쳤습니다. '눈알이 제일 맛있단다'라니, 너무 자극적인 거 아닌가 싶었거든요. 그런데 막상 첫 문장을 읽는 순간 책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1993년생 한국계 작가 모니카 김의 데뷔 소설이 브램 스토커상을 수상하고 《타임》 100대 필독서에 이름을 올린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저녁 식탁에서 시작된 이야기 — 이 소설의 배경 밥상에서 누군가가 생선 눈알을 꺼내들 때 소름이 돋았던 기억이 있으신가요? 모니카 김 작가는 바로 그 장면에서 이 소설을 시작했습니다. 한국 가정의 저녁 식탁이라는, 너무나 익숙한 풍경에서 공포가 싹튼다는 설정이 기묘하게 친근하게 느껴집니다.소설의 첫 문장은 "엄마는 항상 눈알이 제일 맛있는 부위라고 말했다"입니다. ..

카테고리 없음 2026. 9. 9. 22:27
나는 전설이다 (SF 소설, 공포 소설, 다수와 소수)

괴물이라고 부르는 쪽이 실은 괴물이라면 어떻게 될까요. 리처드 매드슨의 1954년작 『나는 전설이다』를 다 읽었을 때, 제가 가장 먼저 느낀 건 공포가 아니라 당혹감이었습니다.흡혈귀 소설인데 진짜 무서운 건 따로 있었다학생 때 심리학 수업에서 직접 진행해 본 실험이 있습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때 발목 높이쯤에 보이지 않는 실이 있는 것처럼 발을 살짝 들어 넘기는 동작을 먼저 하면, 뒤따라 내리는 사람들이 영문도 모른 채 똑같이 발을 들어 넘기는지를 확인하는 거였습니다. 결과는 꽤 선명했습니다. 대다수가 따라 했고, 오히려 따라 하지 않은 사람이 어색해 보일 지경이었습니다.이 경험이 『나는 전설이다』를 읽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소설 속 주인공 로버트 네빌은 핵전쟁과 세균 전쟁 이후 인류가..

카테고리 없음 2026. 9. 9. 18:48
탕비실 (사무실 빌런, 현실 공포, 하이퍼리얼리즘)

회사에서 탕비실을 쓸 때, 누군가의 행동이 유독 거슬렸던 적 있으십니까? 저는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제가 그 '거슬리는 사람'이었을 가능성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미예 작가의 신작 《탕비실》은 바로 그 불편한 가능성을 정면으로 건드리는 소설입니다.사무실 빌런은 항상 자기가 빌런인 줄 모릅니다직장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평판이 존재합니다. 여기서 평판이란 단순히 업무 능력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저 사람이랑 같이 있으면 어떤가'에 대해 동료들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형성된 인상을 말합니다. 옆자리에서 손톱을 깎거나, 식탐을 부리거나, 사무실 전화가 와도 항상 자리를 비우는 사람들이 빌런으로 지목되곤 하는데, 저도 직장 생활을 하면서 그런 사람을 한두 명쯤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었습니..

카테고리 없음 2026. 9. 9. 17:26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서술 트릭, 밀실 미스터리, 애거서 크리스티)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소설이 추리소설이라는 사실을 처음 접했을 때, 솔직히 반신반의했습니다. 그런데 그 주인공이 바로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였습니다. 103개 국어로 번역된 이 작품을 직접 읽고 나서야, 그 수식어가 과장이 아니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밀실 미스터리의 완성형, 인디언 섬의 구조『그리고 아무도 없었다』(And Then There Were None, 1939)는 이른바 밀실 미스터리(Closed Circle Mystery)의 교과서로 불립니다. 여기서 밀실 미스터리란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공간에 용의자들을 가두고, 그 안에서 사건을 전개하는 구조를 말합니다. 탈출구도, 외부 구조도 없는 섬이라는 설정이 긴장감을 극대화하는 장치로 기능합니다.인디언 섬이라는 무인..

카테고리 없음 2026. 9. 6. 22:50
죽은 집에 관한 기록 (하우스 호러, 공포소설, 오컬트소설)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있어도 주변 시세보다 싸다면 살겠냐는 질문에, 저는 주저 없이 "부동산이 더 무섭지. 당연히 살아야지."라고 답했습니다. 그런데 전건우 작가의 신작 《죽은 집에 관한 기록》을 읽고 나서는 그 대답을 한 번 더 곱씹게 됐습니다. 이 소설이 다루는 공포는 단순히 귀신이 나오는 집이 아니라, 빌라 전체를 집어삼키는 무차별적 저주이기 때문입니다.하우스 호러가 가장 무서운 이유이 소설은 이메일, CCTV 녹화본, 통화 녹취, 인터뷰 같은 기록 형식으로 구성됩니다. 여기서 '파운드 푸티지(found footage)' 기법이라는 말을 씁니다. 파운드 푸티지란 실제로 발견된 영상이나 문서처럼 꾸며 현실감을 극대화하는 서사 장치인데, 이 소설은 영상 매체가 아닌 텍스트에서 그 효과를 구현해냅니다...

카테고리 없음 2026. 9. 6. 21:44
이상한 집 (일본소설, 미스터리, 평면도 공포)

집 평면도를 볼 때 이상한 걸 찾아낼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네모난 선들이 그려진 종이 한 장에서 공포를 느끼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요. 일본에서 30만 부를 돌파하고 영화화까지 확정된 우케쓰의 소설 《이상한 집》, 제가 읽고 나서 느낀 걸 그대로 풀어보겠습니다.평면도 한 장이 어떻게 공포가 됐나2020년, 일본의 정체불명 유튜버 우케쓰가 올린 영상 하나가 조회 수 1,000만 뷰를 돌파했습니다. 전신 검정 타이즈에 흰 가면을 쓴 이 크리에이터는 나이도, 성별도, 거주지도 공개하지 않은 채 오로지 주택 평면도 한 장을 들고 나타났습니다. 구독자 65만 명, 누적 조회 수 7,000만 뷰를 기록한 채널이지만 실체는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습니다.제가 처음 이 책의 표지 평면도를 봤을 때는 솔..

카테고리 없음 2026. 9. 6. 20:21
슬라임도살자 본풀이 (K-오컬트, 단편소설)

죽기 직전 연결된 신이 첫 마디로 꺼낸 건 구조 방법이 아니라 자기 과거사였습니다. 제가 이 설정을 읽었을 때 피식 웃음이 나왔는데, 그게 이 소설의 핵심이기도 했습니다.신에게도 절차가 있다 — K-오컬트와 본풀이 형식혹시 '본풀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본풀이(本풀이)란 제주 무속 신화에서 신의 내력과 탄생을 풀어내는 이야기 형식입니다. 쉽게 말해 신이 어떻게 그 신이 되었는지를 읊어주는 구술 신화인데, 굿판에서 신을 소환하려면 먼저 그 신의 내력을 읊어야 한다는 전통에서 비롯됩니다. 김해솔 작가는 이 형식을 그대로 가져와 현대 소설에 이식했습니다.『슬라임도살자 본풀이』의 화자는 본명 지장(地藏), 활동명 슬라임도살자입니다. 지장이라는 이름은 '땅에 묻는다'는 의미를 품고 있는데, 이 단어 하나에 ..

카테고리 없음 2026. 9. 5.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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