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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과 구병모 (노화 서사, 현재멈춤형, 파과의 의미)

-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냉장고 과일을 방치하다 꺼내보면 이미 그 안에서 조용히 무너져 있습니다. 사올 때의 싱싱함은 흔적도 없고, 만지는 순간 손 안에서 물컹하게 흘러내립니다. 냉장고에서 보던 이 장면이 구병모의 소설 《파과》를 읽으면서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 소설은 바로 그 찰나, 부서지기 직전의 것들이 오히려 가장 강하게 빛나는 순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노화 서사 — 퇴물이 된 킬러가 건드리는 것들솔직히 이 소설을 처음 접했을 때, 65세 여성 청부 살인업자라는 설정이 얼마나 설득력 있게 굴러갈 수 있을지 반신반의했습니다. 노인, 여성, 킬러. 이 세 단어를 한 인물에 붙이는 것 자체가 한국 소설에서는 거의 전례가 없는 시도입니다. 주인공 조각(爪角)은 40여 년간 '방역 작업..

카테고리 없음 2026. 10. 8. 07:02
고시원 기담 (공간, 삶이야기, 옴니버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고시원에 사는 여덟 명 중 단 한 명도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고시원 기담』이 처음 꺼내는 사실이 이것입니다. 저는 이 문장을 읽고, 이틀 동안 업무 때문에 모텔에 머물렀던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습니다. 미로 같은 복도를 걸으면서 아무도 내가 여기 있다는 걸 모르길 바랐던, 그 이상한 마음이요.유령처럼 산다는 것 — 고시원이라는 공간고시원이라는 공간을 흔히 '가난한 사람들이 잠깐 머무는 곳'으로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이 책을 읽고 나서 그 인식이 꽤 단순했다고 느꼈습니다. 고문고시원의 원래 이름은 '공문고시원', 즉 '공부의 문'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간판의 글자 하나가 떨어져 나가면서 '고문(拷問)고시원'이 되어버렸죠. 작가가 이 설정을 그냥 넣은 게 ..

카테고리 없음 2026. 10. 7. 08:00
내 시체를 찾아주세요 (예약발행, 복수극, 스릴러소설)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죽은 사람의 블로그에 새 글이 올라온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연속으로. 《내 시체를 찾아주세요》는 이 설정 하나로 읽는 내내 손을 놓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일본 최대 창작 플랫폼 'note'가 주최한 창작대상2023에서 문예편집부상과 TV도쿄 영상화상을 동시에 받은 작품이라는 말을 듣고 펼쳤는데, 단숨에 읽어버렸습니다. 단순한 실종 미스터리가 아니었거든요.예약발행이라는 장치, 죽은 자의 목소리회사에 다닐 때 메일 예약 발송 기능을 종종 썼습니다. 지금 보내도 되는 메일인데, 마음의 준비가 조금 더 필요할 때 한두 시간 뒤로 예약을 걸어두곤 했죠. 그때의 기분이 묘했는데, 마치 제가 내지 못하는 용기를 메일이 대신 내주는 것 같았습니다.이 소설의 핵심 장치가 바로 그겁니..

카테고리 없음 2026. 10. 6. 07:30
치팅 데이 (다크히어로, 사이코패스, 반전소설)

-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살인마가 주인공인데 오히려 응원하게 된다면, 그게 가능한 이야기일까요. 저는 다이어트 치팅데이를 떠올리다 이 소설을 펼쳤고, 첫 장을 덮을 때쯤엔 그 단어가 완전히 다른 무게로 느껴졌습니다. 이현진 작가의 『치팅 데이』, 생각보다 훨씬 많은 걸 건드리는 소설이었습니다.다크히어로 코드, 한국 소설에서도 통할까일반적으로 한국 소설의 주인공은 도덕적으로 선한 쪽에 가까워야 독자의 공감을 얻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믿어 왔는데, 이 소설을 읽고 나서는 그 전제가 꽤 흔들렸습니다.주인공 정희태는 초등학교 교사입니다. 낮에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한 달에 한 번 자신이 정한 기준의 악인을 직접 처단합니다. 이것이 그의 치팅데이입니다. 여기서 치팅데이란 원래 다이어트를 하는..

카테고리 없음 2026. 10. 5. 08:00
기억 전달자 (디스토피아, 통제사회, 열린결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1994년 뉴베리상을 수상한 로이스 로리의 『기억 전달자』가 국내 누적 30만 부를 넘어섰습니다. 처음 이 수치를 보고 솔직히 조금 놀랐습니다. 청소년 SF 소설이 30년 가까이 꾸준히 읽힌다는 건, 단순히 "잘 쓴 소설"이라는 설명만으로는 부족한 뭔가가 있다는 뜻이니까요. 제가 직접 읽어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이 책은 완벽해 보이는 통제 사회 속에서 감정과 기억을 되찾아가는 한 소년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지금 우리 사회를 향한 날카로운 질문이기도 했습니다.통제사회의 민낯, 디스토피아란 무엇인가『기억 전달자』의 배경은 표면상 이상적인 미래 마을입니다. 출산, 직업, 가족 구성, 심지어 감정까지 모두 중앙에서 결정됩니다. 갈등이 없고, 차별이 없으며, 모두가 '늘..

카테고리 없음 2026. 10. 4. 09:00
트로피컬 나이트 (장르소설, 한국호러, 단편집)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공포 소설을 읽으면서 위로를 받은 적이 있으신가요? 조예은의 두 번째 단편집은 괴물과 몽마, 살인마가 등장하는데도 이상하게 읽고 나면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처음엔 그 이유를 몰랐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이건 공포를 소재로 쓴 위로의 소설이라는 생각이 굳어졌습니다.장르소설이 할 수 있는 것들, 팩트로 따져보면《트로피컬 나이트》는 조예은이 2023년 출간한 두 번째 소설집입니다. 제2회 황금가지 타임리프 소설 공모전 우수상, 제4회 교보문고 스토리 공모전 대상을 거쳐 《뉴서울파크 젤리장수 대학살》 《칵테일, 러브, 좀비》 《스노볼 드라이브》를 발표하며 독자층을 쌓아온 작가의 작품입니다. 단편 여덟 편을 묶었고, 장르로는 호러·스릴러와 판타지의 교차점 어딘가에 위치합니다.여기서 "..

카테고리 없음 2026. 10. 3. 10:00
멋진 신세계 (디스토피아, 헉슬리, 전체주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친구랑 술 한 잔 하다가 "우리가 중세 농노로 태어났으면 어땠을까"라는 말을 꺼낸 적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비교할 대상도 없고, 그냥 주어진 대로 살면 오히려 더 행복하지 않을까 하는 자조 섞인 농담이었습니다. 그런데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다시 펼쳤을 때, 그 농담이 더 이상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습니다. 이 소설은 바로 그 '아무것도 모르고 행복한 세계'가 실현된 미래를 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인간을 공장에서 찍어내는 세계, 소설이 아니라 예언입니다《멋진 신세계》는 1932년에 출간된 소설입니다. 배경은 수백 년 뒤의 미래지만, 헉슬리가 설계한 세계관의 정밀함은 지금 읽어도 소름이 돋을 정도입니다. 제가 처음 이 책을 읽은 건 학창 시절이었는데, 솔직히 ..

카테고리 없음 2026. 10. 2. 07:34
밸런스 게임 지옥 (선택의 딜레마, 가해자, 스릴러 소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밸런스 게임이 그렇게 무서운 소재가 될 수 있다는 걸 몰랐습니다. 친구들과 "평생 여름 vs 평생 겨울" 같은 말도 안 되는 선택지를 두고 웃고 떠들던 게 전부였으니까요. 그런데 김종일 작가의 신작 장편소설 『밸런스 게임 지옥』을 읽고 나서, 그 가벼운 게임이 얼마나 잔인한 구조를 품고 있는지 새삼 실감했습니다.선택의 딜레마 — "두 가지 밖에 없다"는 게 왜 지옥인가저는 MBTI에서 N 성향 친구들이 모이면 밸런스 게임을 정말 진지하게 파고드는 편이었습니다. "30살에 죽기 vs 30000살까지 살기" 같은 황당한 선택지도 나름의 논리를 붙여가며 한참동안 토론하곤 했죠. 그런데 그럴 때마다 꼭 한 명씩은 "그런 일은 안 생겨"라고 흥을 깨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말이 맞..

카테고리 없음 2026. 10. 1. 09:20
대멸종 (재난소설, SF소설, 디스토피아)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올 여름, 뉴스를 보다 문득 손을 멈춘 적이 있습니다. 또 어딘가에서 폭염 기록이 깨졌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과학 상상화에 그렸던 날아다니는 자동차나 해저도시는 어디 갔는지, 막상 현실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굴러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답답함이 채 가시기 전에 집어 든 책이 바로 안전가옥 앤솔로지 〈대멸종〉이었습니다.앤솔로지 〈대멸종〉이 담고 있는 것들〈대멸종〉은 2018년 겨울 안전가옥 스토리 공모전 수상작 다섯 편을 묶은 앤솔로지입니다. 여기서 앤솔로지란 여러 작가의 단편을 하나의 주제로 엮어 출간한 작품집을 뜻합니다. 안전가옥이 이미 〈냉면〉으로 첫 앤솔로지를 선보인 바 있으니 이 책은 두 번째 시도인 셈입니다.수록작 다섯 편은 공통적으로 '한 세계의..

카테고리 없음 2026. 9. 30. 07:30
39계단 (1910년대 배경, 첩보소설, 존 버컨)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솔직히 저는 1915년에 쓰인 소설이 이렇게 읽힐 줄 몰랐습니다. 100년이 넘은 첩보소설이라길래 시대적 한계가 클 거라 지레 짐작했는데, 막상 펼쳐보니 짧은 영화 한 편을 본 기분이었습니다. 존 버컨의 『39계단』,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마지막 장을 덮게 만드는 소설입니다.1910년대 배경 — 이 소설이 태어난 맥락『39계단』이 출판된 1915년은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시기입니다. 저자 존 버컨(John Buchan, 1875~1940)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작가이자 실제 정치인이었는데, 이 배경이 소설 전체에 짙게 깔려 있습니다. 단순한 모험담이 아니라, 유럽 열강 간의 첩보전이라는 실제 역사적 맥락 위에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여기서 첩보전이란 국가 기밀을 탈취하거나..

카테고리 없음 2026. 9. 29.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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