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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카세트테이프가 무서울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 있으십니까? 저는 어렸을 때 자기 전에 영어 소설을 읽어주는 테이프를 틀어놓고 잠을 청하던 아이였습니다. 나른한 남자 성우의 목소리와 위잉 돌아가는 릴 소리가 백색소음이었고, 테이프 한 면이 끝날 때 탁 소리에 살짝 눈이 떠지던 기억도 생생합니다. 전건우 작가의 신작 『믹스테이프』를 읽으면서 그 기억이 제일 먼저 떠올랐습니다. 만약에 익숙한 그 탁 소리 직후에 낯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면, 저는 그날 밤 절대로 잠들지 못했을 겁니다.
카세트테이프라는 매체가 왜 공포가 되는가
아날로그 매체가 공포 장치로 쓰인 사례는 꽤 있습니다. 그런데 『믹스테이프』가 특별한 건 카세트테이프 특유의 물성, 그러니까 A면과 B면이라는 양면 구조 자체를 서사 뼈대로 삼는다는 점입니다. 소설은 A-Side 11트랙, B-Side 10트랙으로 나뉩니다. A면에서 사건이 폭발하고, B면에서 그 이면의 진실이 뒤집히는 방식입니다. 저는 이 구조를 접했을 때 꽤 감탄했습니다. 목차만 봐도 이미 작가가 무엇을 하려는지 예고하고 있거든요.
소설의 핵심 장치는 믹스테이프입니다. 믹스테이프란 라디오나 다른 음원에서 여러 곡을 직접 녹음해 한 테이프에 엮어 만든 개인 편집 테이프를 의미합니다. 지금의 플레이리스트와 비슷하지만, 한 번 잘못 녹음하면 되돌릴 수 없다는 점에서 훨씬 더 정성과 집중이 필요한 작업이었습니다. 작가의 말에서도 언급되듯이, 누군가에게 건네기 위한 믹스테이프를 만들려면 곡 선정부터 멘트 녹음까지 꽤 많은 공을 들여야 했죠. 그 집념이 뒤틀렸을 때 어떤 결과를 낳는지, 이 소설은 그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제가 읽으면서 가장 소름 돋았던 부분은 저주의 발동 메커니즘이었습니다. 흑주술이란 타인을 해치거나 파멸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행사하는 주술적 행위를 뜻합니다. 소설 속 테이프의 저주는 단순히 듣는 것만으로는 완성되지 않습니다. 들은 사람이 그 목소리에 대해 누군가에게 설명하는 순간, 즉 공유하려는 행위 자체가 저주의 방아쇠가 됩니다. 사람이 무언가 이상한 것을 경험하면 본능적으로 말하고 싶어진다는 사실, 그 가장 기본적인 심리를 정확히 겨냥한 설정이라서 읽는 내내 섬뜩했습니다.
- A-Side: 연쇄 자살 사건의 발생과 저주 추적, 속도감 있는 전개
- B-Side: 저주의 원점과 흑주술의 배후, 반전과 진실 규명
- 저주의 트리거: 테이프 청취 자체가 아닌, 목소리를 타인에게 설명하는 행위
- 저주의 무기: 피해자 내면 깊이 숨겨진 죄책감과 수치심
죄책감이라는 가장 한국적인 오컬트 공포
전건우 작가 소설을 몇 권 읽어본 분이라면 공통적으로 느끼는 게 있을 겁니다. 귀신이 물리적으로 해를 가하기보다 인물 내면을 파고든다는 것입니다. 『믹스테이프』도 같은 방향입니다. 테이프를 들은 사람들이 죽는 이유는 단순히 목소리가 무서워서가 아닙니다. 목소리가 그 사람 안에 숨겨져 있던 가장 수치스러운 기억, 도저히 직면하고 싶지 않은 죄의식을 끄집어내기 때문입니다. 죄책감을 무기로 삼는 이 설정이 제 경험상 가장 무서운 종류의 공포입니다. 귀신은 피할 수라도 있지만, 본인 안에 있는 것은 어디로도 도망갈 수 없으니까요.
성악설(性惡說)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쉽게 말해 인간의 본성은 태어날 때부터 악하다는 사상으로, 순자가 주창한 동양 철학의 개념입니다. 소설에서도 이 관점이 자연스럽게 녹아있습니다. 모든 인물이 크든 작든 감추고 싶은 죄를 하나씩 품고 있고, 테이프는 그것을 건드립니다. 단순히 죽은 자의 목소리를 들으면 죽는다는 저주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자기 안의 가장 어두운 부분을 스스로 감당하지 못해 파멸한다는 이야기로 볼 수도 있습니다.
캐릭터 면에서도 짚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조수 지미소는 제가 읽으면서 가장 눈에 들어온 인물입니다.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마주 보기를 선택하는 장면, 빈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는 깨달음은 텍스트로 읽히면서도 꽤 선명하게 남았습니다. 다른 시리즈에서 다시 볼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그리고 월광선녀와 함께 등장하는 애기신녀라는 명칭, 전건우 작가의 다른 시리즈인 어두운 물, 어두운 숲, 어두운 집에서 본 기억이 있는 독자라면 반갑게 느낄 디테일입니다. 나이대가 맞지 않아 같은 인물은 아닌 것으로 보이지만, 작가의 세계관 안에서 의도적으로 호명한 것처럼 느껴져 반가웠습니다.
무속 신앙이란 무당을 중심으로 신령이나 귀신과 소통하며 인간의 길흉화복을 다루는 한국 고유의 민간 신앙 체계를 말합니다. 이 소설은 그 무속의 요소를 흑주술과 결합시켜 단순한 도시 괴담이 아닌 한국적 오컬트 서사로 완성합니다. 박수현이라는 인물이 테이프 안에서 내는 목소리는 텍스트임에도 불구하고 제 경험상 꽤 소름 돋게 읽혔습니다. 살인 묘사가 부분적으로 꽤 잔인하게 느껴지는 장면들이 있으니, 이쪽에 예민하신 분은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전건우 작가가 이렇게 빠른 속도로 신작을 낸다는 사실이 읽고 나서도 신기했습니다. 몸이 세 개가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K-호러라는 장르 분류가 정착된 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K-호러란 한국적 정서, 특히 무속 신앙·한·죄의식·가족 서사 등을 공포 서사와 결합한 한국발 공포 장르를 의미합니다. 이 소설은 그 정의에 매우 충실합니다. 디지털 공포가 아닌 아날로그 매체를 중심에 놓음으로써 느끼는 서늘함은, 요즘 나오는 다른 공포물과 확실히 결이 다릅니다. 관련하여 오디오북으로 먼저 공개되어 좋은 반응을 얻었다는 점(출처: Storytel)도 흥미롭습니다. 귀로 먼저 들린 이야기라는 점에서, 카세트테이프라는 매체와 묘하게 어울리는 선공개 방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믹스테이프』 소설, 정말 무섭게 읽히나요?
A. 제가 직접 읽어봤는데, 물리적 공포보다 심리적 공포 쪽에 가깝습니다. 죽은 자의 목소리 묘사는 텍스트임에도 꽤 소름이 돋았고, 살인 장면 일부는 꽤 잔인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전건우 특유의 빠른 속도감 덕분에 긴장이 끊기지 않고 이어집니다.
Q. 전건우 작가 소설을 처음 읽는데 이 책부터 봐도 될까요?
A. 『믹스테이프』는 기존 시리즈와 독립적으로 읽을 수 있는 장편입니다. 다만 어두운 물·숲·집 시리즈를 읽은 독자라면 등장하는 고유명사에서 반가운 디테일을 하나 더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처음 접하는 분도 흐름을 따라가는 데 전혀 문제 없습니다.
Q. A면과 B면 구성이 읽는 데 헷갈리지는 않나요?
A. 오히려 반대입니다. A-Side에서 쌓아 올린 궁금증이 B-Side에서 풀리는 구조라 몰입이 자연스럽게 유지됩니다. 다만 B면에서 뒤집히는 반전이 꽤 여러 겹으로 쌓이기 때문에, 앞부분에 등장한 인물 이름을 기억해두면 더 선명하게 읽힙니다.
Q. 오디오북으로 먼저 들으면 더 무섭게 느껴질까요?
A. Storytel에서 선공개된 오디오북으로 먼저 접한 독자들의 반응이 좋았다고 합니다. 카세트테이프 속 목소리가 소재인 만큼 귀로 먼저 듣는 경험이 공포 체감에 확실히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다만 저는 텍스트로 읽었는데도 박수현의 목소리 묘사는 충분히 소름 돋았습니다.
결론
『믹스테이프』는 저주받은 물건을 찾는 탐정이라는 설정 자체는 클래식하지만, 그 안에 담긴 공포의 원리가 다릅니다. 귀신이 무섭기 때문이 아니라, 그 귀신이 나 자신 안에 있는 죄의식을 건드리기 때문에 무서운 소설입니다. 카세트테이프라는 아날로그 매체를 공포의 중심에 놓은 감각도 제 경험상 꽤 오래 남았습니다.
지미소라는 캐릭터가 시리즈로 이어지기를 기대하는 마음, 전건우 작가가 또 어떤 신작을 들고 나타날지에 대한 궁금증도 생겼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