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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엽다는 감각이 과연 절대적인 것일까요. 제가 어릴 때 장터에서 본 강아지는 뾰족한 주둥이에 아기 늑대 같은 얼굴이었는데, 그게 너무 귀여워서 한참을 들여다봤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설재인의 소설 『셸리 숍앤센터』를 읽고 나서야 그 감각이 얼마나 조건화된 것인지 새삼 의심하게 됐습니다. 버려진 인체 기관들을 이어 붙여 만든 반려동물 '프랑'이라는 설정은, 읽는 내내 불편하면서도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바디 호러가 불편한 이유

바디 호러란 신체의 변형·훼손·해체를 공포의 핵심 기제로 삼는 장르입니다. 여기서 바디 호러란 단순히 내장이 튀어나오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당연하게 여기는 몸의 완전성과 경계가 무너지는 데서 오는 근원적 불안을 자극하는 서사 전략을 뜻합니다.

『셸리 숍앤센터』에서 팔이 여덟 개이거나 코가 네 개이거나 겹눈을 가진 프랑의 외형 묘사는, 솔직히 처음에는 그냥 징그럽게 읽혔습니다. 버려진 인체 기관들을 조합해 새로운 생명체를 만든다는 발상 자체가 인간 신체에 대한 존엄성을 철저히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졌거든요. 그런데 읽다 보니 그 불편함이 오히려 작가의 의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웨일홀이라는 교통수단은 순간 이동에 버금가는 혁신적 기술이지만, 이용자의 신체 일부가 1퍼센트 확률로 탈락하는 부작용을 낳습니다. 여기서 웨일홀이란 편의와 효율을 위해 신체적 위험을 용인하는 사회의 태도를 압축한 장치로, 그 탈락된 기관들이 쌓여 프랑이 된다는 흐름은 단순한 SF적 상상이 아니라 폐기와 재활용이라는 자본주의 논리를 몸의 언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제가 가장 불편하게 읽은 장면은 프랑이 "개보다 나은 반려동물"로 광고되는 대목이었습니다. 인간의 언어로 소통이 가능하지만 철저하게 펫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는 존재라는 설정이, 단순한 픽션이 아니라 현실 어딘가를 정확히 겨누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요약: 바디 호러라는 장르적 장치는 단순 공포가 아니라, 신체 착취와 폐기라는 사회 구조를 몸의 언어로 드러내는 은유로 작동합니다.

프랑이라는 타자성의 문제

타자성이란 주류 집단이 규정한 '정상'의 바깥에 놓인 존재들이 경험하는 근본적인 다름의 감각을 뜻합니다. 소설 속 프랑은 이 타자성을 몸 자체로 구현합니다. 인간이 취향에 따라 커스텀 주문하고, 필요에 따라 소비하고, 싫증 나면 유기하는 존재. 그 몸의 '다름'이 열등함의 표식으로 읽히는 구조가 책 전반에 깔려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노엘이라는 캐릭터의 위치입니다. 노엘은 인간과 외형이 동일한 프랑인데, 그렇기 때문에 인간 세계와 프랑 세계 사이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합니다. 제 경험상 이런 경계적 존재를 다루는 소설들이 종종 그 애매함을 낭만화하곤 하는데, 이 작품은 그렇지 않습니다. 노엘의 분노는 낭만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입니다.

소설에서 등장하는 "역사는 순환한다"는 대사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신분제가 사라지면 인종을 따지고, 인종차별이 완화되면 성별을 따지고, 그마저 사라지자 경제적 계급이 부상한다는 서술은 혐오의 대상이 언제나 다음 집단으로 이동해왔다는 역사적 패턴을 직접 지목합니다. 프랑은 그 순환의 가장 최신 버전인 셈입니다.

귀여움과 아름다움의 기준이 주류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저도 강아지를 생각할 때 어렴풋이 느꼈는데, 이 소설은 그 감각을 훨씬 더 날카롭게 밀어붙입니다. 어떤 다른 세계에서는 지금의 강아지 얼굴을 전혀 귀엽게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 그리고 그 판단 자체가 얼마나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인지를 다시 물어보게 됩니다.

  • 프랑의 외형적 다름은 열등함의 표식으로 소비되지만, 역설적으로 새로운 가능성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 노엘은 인간과 프랑 사이의 경계에 선 존재로, 두 세계 모두를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합니다.
  • 혐오의 대상이 역사적으로 이동해왔다는 소설의 지적은 단순한 SF 설정이 아니라 현실 역사를 반영합니다.
요약: 프랑이라는 타자는 역사 속에서 반복되어온 혐오의 순환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존재입니다.

노엘과 허슬, 버디물의 문법을 비틀다

버디물이란 서로 다른 두 캐릭터가 갈등과 화해를 거쳐 연대를 형성하는 서사 구조를 말합니다. 여기서 버디물이란 흔히 우정과 유머로 귀결되는 장르인데, 노엘과 허슬의 관계는 그 문법을 상당히 불편한 방식으로 비틉니다.

허슬은 150킬로그램에 달하는 거구의 프랑으로, 처음에는 노엘을 매일 괴롭히는 존재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동시에 다른 이들이 노엘을 건드리는 건 참지 못하고, 본능적으로 몸을 던져 노엘을 지키려 합니다. 이 폭력과 보호의 기묘한 공존이 처음에는 불쾌하게 읽혔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단순히 "처음엔 싫었는데 나중엔 친구가 됐어요" 식으로 흘러가지 않거든요.

두 프랑이 연대의 제스처를 교환하는 장면, 즉 "죽이고 싶은 인간들 세 명만 겹치면 같이 나가자"는 허슬의 제안은 이 관계가 우정이라는 언어만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는 걸 보여줍니다. 이건 폭력적 연대, 혹은 생존을 위한 동맹이라는 표현이 더 가깝습니다.

이런 비전형적인 버디 서사에 대해 더 자연스럽게 감동적으로 그렸어야 한다는 시각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읽기엔 이 불편함이 오히려 작품의 강점입니다. 학대와 착취를 경험한 존재들이 형성하는 연대가 따뜻하고 아름답기만 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현실의 피해자 연대가 늘 상큼하게 그려지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요약: 노엘과 허슬의 관계는 전통적 버디물의 문법을 거부하고, 폭력과 보호가 뒤섞인 생존 동맹이라는 불편하지만 솔직한 연대를 보여줍니다.

에필로그의 반전, 아이러니인가 과잉인가

소설의 에필로그 격인 「어느 시대에」에서 제가 가장 소름 돋은 장면은, 과거에는 흉물이라 불리던 프랑의 외형이 어느새 '정상'의 기준으로 자리 잡은 세계의 모습이었습니다. 팔이 여덟 개인 몸, 겹눈을 가진 얼굴이 부의 상징이 된 세계. 계급의 위치는 달라졌지만 계급 구조 자체는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암시가 꽤 묵직하게 남았습니다.

그 반전이 이루어진 것은 저절로 된 일이 아니라는 점도 중요합니다. 노엘과 허슬, 그리고 셀 수 없는 프랑들의 계획과 희생이 쌓여서 만들어진 결과입니다. 혁명이 끝난 뒤의 세계가 조화롭지 않다는 것, 이전의 위계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역사가 실제로 보여주는 패턴이기도 합니다. 출처: 한국연구재단 학술지에서도 디스토피아 서사 연구에서 혁명 이후의 재위계화가 반복적으로 다뤄지는 주제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재위계화란 혁명이나 체제 전환 이후에도 새로운 형태의 위계가 재형성되는 현상을 뜻합니다.

다만 결말부 구성에 대해서는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마지막에 반전이 겹쳐 쌓이면서 서로 타인이던 관계가 갑자기 혈연과 역사로 연결되는 부분은, 솔직히 과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사실 난 너야, 사실 내가 너의 엄마야" 식으로 연결고리가 하나씩 드러날 때마다 몰입이 끊기는 경험을 했습니다. 이런 연결이 꼭 필요했는지에 대해서는 독자마다 판단이 다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작가가 작가의 말에서 밝힌 방향, 즉 "흉물이 흉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세상을 문장으로 선사하고, 왜 그것이 다시금 당신에게 흉하게 보이는지 묻는 것"이라는 문학적 목표는 본문 내내 충실히 이행됩니다. SF 장르 비평 연구에서도 이처럼 스펙큘러티브 픽션, 즉 현실 세계의 사회적 문제를 가상의 세계에 투영해 낯선 거리감을 만들어내는 장르적 전략이 가장 효과적인 사회 비판의 방식 중 하나로 평가됩니다(출처: 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요약: 에필로그의 재위계화는 묵직한 여운을 남기지만, 반전이 겹쳐 쌓이는 결말 구성은 몰입을 방해하는 과잉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셸리 숍앤센터, 잔인한 장면이 많이 나오나요?

A. 바디 호러 장르인 만큼 신체 훼손이나 폭력적인 묘사가 꽤 등장합니다. 다만 잔인함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고어물과는 결이 다릅니다. 불편한 장면들이 대부분 서사적 맥락과 연결되어 있어서, 저는 읽는 내내 오히려 그 불편함이 사회적 메시지로 흡수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공포 자체보다 사회 비판에 더 익숙한 독자라면 충분히 읽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Q. 노엘이 인간인지 프랑인지 헷갈리는데, 결말에서 명확히 밝혀지나요?

A. 이 질문 자체가 소설의 핵심 긴장감입니다. 노엘의 정체성은 명확히 규정되기보다는 끝까지 경계에 머무는 방식으로 다뤄집니다. 정체성을 확정짓는 결말을 기대하는 독자에게는 다소 열린 느낌일 수 있고, 경계 자체를 탐구하는 방식을 좋아하는 독자에게는 오히려 더 풍부하게 읽힐 수 있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Q. 설재인 작가 다른 작품도 비슷한 스타일인가요?

A. 설재인 작가는 장르를 가리지 않고 작품 세계를 넓혀온 것으로 알려져 있어서, 작품마다 톤이 다릅니다. 『셸리 숍앤센터』는 바디 호러와 SF, 사회 비판이 결합된 경우라 다소 특이한 위치에 있습니다. 이 작품이 첫 접점이라면, 다른 작품들은 이것보다 장르적으로 더 전통적이거나 온화한 경우도 있다는 점을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Q. 프랑이 결국 인간을 이기는 결말인가요?

A. 단순한 승패 구도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소설은 혁명 이후에도 새로운 위계가 형성된다는 점을 에필로그에서 암시합니다. 프랑이 인간을 넘어선 뒤의 세계가 곧 이상적인 세계는 아닐 수 있다는 열린 결말이며, 저는 그게 오히려 더 정직한 서사라고 느꼈습니다.


결론

『셸리 숍앤센터』는 제가 읽은 국내 SF 중 가장 오랫동안 손이 불편했던 책입니다. 인체 기관을 재활용해 반려동물을 만든다는 설정 자체가 주는 물리적인 불쾌감, 거기에 그 존재가 인간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 서사가 덧씌워질 때 느껴지는 사회적 불쾌감이 두 겹으로 쌓입니다. 그 불편함이 독서 경험을 방해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작품의 핵심을 전달하는 방식이었다는 걸 다 읽고 나서야 정리가 됐습니다.

결말부의 반전 중첩이 다소 과하다고 느낀 점은 솔직히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에필로그가 던지는 질문, 즉 혁명 이후에도 위계는 재편될 뿐 사라지지 않는다는 통찰은 충분히 오래 남습니다. 바디 호러 장르가 낯선 분이라도, 타자성과 연대라는 주제에 관심이 있다면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작품이라고 봅니다.

참고: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209245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