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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직전 연결된 신이 첫 마디로 꺼낸 건 구조 방법이 아니라 자기 과거사였습니다. 제가 이 설정을 읽었을 때 피식 웃음이 나왔는데, 그게 이 소설의 핵심이기도 했습니다.



신에게도 절차가 있다 — K-오컬트와 본풀이 형식

혹시 '본풀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본풀이(本풀이)란 제주 무속 신화에서 신의 내력과 탄생을 풀어내는 이야기 형식입니다. 쉽게 말해 신이 어떻게 그 신이 되었는지를 읊어주는 구술 신화인데, 굿판에서 신을 소환하려면 먼저 그 신의 내력을 읊어야 한다는 전통에서 비롯됩니다. 김해솔 작가는 이 형식을 그대로 가져와 현대 소설에 이식했습니다.

『슬라임도살자 본풀이』의 화자는 본명 지장(地藏), 활동명 슬라임도살자입니다. 지장이라는 이름은 '땅에 묻는다'는 의미를 품고 있는데, 이 단어 하나에 이 신의 성격이 압축되어 있다고 느꼈습니다. 이천 년 전 살(煞)을 타고난 여자로 태어나 괴물 취급을 받다가, 백정과 망나니처럼 죽음을 업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에 의해 신으로 추앙받은 존재입니다. 여기서 살(煞)이란 사람에게 불행이나 죽음을 불러온다고 여겨지는 나쁜 기운을 뜻하는 무속 개념입니다.

제가 직접 읽어보니, 이 신이 '신(神)부름센터' 소속으로 민원도 받고 절차도 밟는다는 설정이 생각보다 훨씬 잘 작동했습니다. 콜센터를 연상시키는 이 구조 덕분에, 무속이라는 낯선 세계가 아주 일상적인 온도로 읽혔습니다. 신이면서 직장인처럼 보인다는 게 오히려 서늘했습니다.

소설은 제주 무속 신화인 '지장본풀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합니다. 지장본풀이는 제주도 큰굿에서 연행되는 신화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관장하는 신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출처: 제주특별자치도). 작가는 여기에 SNS 쇼츠 시대의 감각을 접붙여, 전통과 현대가 충돌하는 독특한 언어를 만들어냈습니다. 제가 읽으면서 『보건교사 안은영』이 떠올랐는데, 그 소설에서도 사람의 욕망이 젤리처럼 눈에 보이는 설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썩은 부분을 물질로 가시화한다는 발상이 비슷하게 느껴졌습니다.

  • 본풀이: 제주 무속 신화에서 신의 내력을 읊는 구술 형식. 신을 소환하는 의례적 절차
  • 살(煞): 무속에서 불행과 죽음을 불러온다고 여기는 나쁜 기운. 살을 타고났다는 건 태생적 낙인을 의미
  • 지장(地藏): 땅에 묻는다는 뜻. 화자 신의 이름이자 소설 전체의 상징적 키워드
  • 신(神)부름센터: 소설 속 설정. 상황에 맞는 신을 매칭해주는 서비스. 현실의 콜센터를 패러디
요약: 제주 무속 신화 본풀이 형식과 콜센터 설정이 결합된 K-오컬트 블랙코미디로, 신의 내력 읊기라는 전통 의례가 소설의 서사 구조 자체를 이끌어간다.

슬라임은 짓이겨도 된다는 논리 — 교제폭력과 파괴 충동

요즘 말랑이, 왁뿌볼, 슬라임이 왜 그렇게 유행하는지 생각해보신 적 있습니까? 친구가 슬라임을 살 때 왜 이게 좋냐고 물어봤더니 "그냥 짓이기면 시원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대답이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

슬라임은 제멋대로 뭉개고 터뜨려도 되는 대상입니다. 감정을 느끼지 않으니 죄책감도 없습니다. 소설은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듭니다. 가짜 다정함으로 포장된 사람, 겉에서는 윤기 흐르는 팬케이크처럼 보이지만 손으로 뭉개면 흐물흐물한 화학물질인 사람. 화자 지장은 그런 존재들을 '슬라임 인간'이라 부르고, 그것을 도살하는 일을 업으로 삼습니다.

데이트 폭력(교제폭력)은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신체적·정서적·성적 폭력을 통칭하는 개념입니다. 여성가족부 통계에 따르면 국내 데이트 폭력 피해자의 상당수가 폭력을 인식하면서도 관계를 지속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이유 중 하나로 '가해자의 일시적 다정함'이 꼽힙니다(출처: 여성가족부). 소설 속 현지의 상황이 딱 이 구조입니다. 다정하게 보이는 남자친구, 그런데 모텔 화장실에 갇혀 "살려주세요"를 외치는 현지.

솔직히 마지막 장면에서 현지가 씩 웃는 부분이 통쾌하면서도 불편했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이중적인 감정이 드는 소설은 오래 남더라고요. 통쾌함은 억눌린 공격성이 해방되는 카타르시스에서 오는 것이고, 불편함은 그 방식이 살인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작가는 그 경계를 일부러 흐릿하게 남겨둔 것 같았습니다. 읽고 나서 "나에게는 어떤 슬라임이 있을까"라는 질문이 자꾸 떠올랐는데, 그게 이 소설이 독자에게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교보문고 스토리대상(제12회 대상)을 받은 전작 『노간주나무』에서도 아동 학대라는 무거운 소재를 오컬트 장르로 다뤘던 작가답게, 이번에도 피해자를 구원받아야 할 존재로 박제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 잠든 파괴 충동과 공격성을 정면으로 끌어냅니다. 제가 이 점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피해자 서사인데 전혀 가엾지 않습니다.

요약: 슬라임 유행의 심리적 기저와 교제 폭력 피해자의 억눌린 공격성을 연결하며, 소설은 피해자를 구원의 대상이 아닌 파괴 충동의 주체로 복원한다.

자주 묻는 질문

Q. 슬라임도살자 본풀이는 어떤 장르인가요?

A. K-오컬트 블랙코미디로 분류됩니다. 제주 무속 신화인 지장본풀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소설인데, 무겁고 서늘한 내용을 유머와 기이한 설정으로 비틀어 읽히게 만든 것이 특징입니다. 오컬트에 낯선 분도 콜센터 직장인처럼 묘사된 신 캐릭터 덕분에 비교적 편하게 진입할 수 있습니다.


Q. 분량이 짧다던데 단편인가요?

A. 장편보다는 짧은 중편 분량입니다. 제가 읽어봤을 때 호흡이 빠르고 밀도가 높아서, 짧다는 느낌보다는 꽉 찼다는 인상이 더 강했습니다. 지장의 본풀이와 현지의 현재 상황이 교차하는 구조라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


Q. 제주 무속 신화를 미리 알아야 읽기 편한가요?

A. 몰라도 충분히 읽힙니다. 화자인 지장이 자신의 내력을 직접 설명하는 구조라, 본풀이나 무속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어도 자연스럽게 따라가게 됩니다. 오히려 알고 읽으면 작가의 재해석 방식이 더 선명하게 보인다는 점에서 예습이 독이 되진 않습니다.


결론

이 소설은 짧지만 빈틈이 없습니다. 지장본풀이라는 전통 무속 형식, 슬라임이라는 현대적 감각, 그리고 교제 폭력이라는 현실의 문제가 하나의 이야기 안에서 겉돌지 않고 맞물립니다. 제가 읽으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피해자를 끝까지 피해자로만 두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현지처럼 신부름센터를 구독할 것이냐고 묻는다면, 제 대답은 '아니오'입니다. 그런 서비스를 찾아야 할 만큼 절박한 상황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쪽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 소설을 권하고 싶은 분은 분명합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가짜 다정함에 지쳐있는 분, 내 안에 오래 억눌린 무언가가 있다고 느끼는 분. 읽고 나면 이상하게 단단해지는 기분이 드는 소설입니다.

참고: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20215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