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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토끼-정보라

화장실에서 물을 내리는데 변기 속에서 누군가 말을 건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는 이 장면을 읽고 나서 의식적으로 며칠간 변기 뚜껑을 닫아두었습니다. 정보라의 소설집 《저주토끼》는 그런 책입니다. 2022년 부커상 인터내셔널 최종 후보에 오른 데다 전 세계 20개국에 번역 계약이 맺어진, 숫자만 보면 화려한 이력이지만 실제로 읽어보면 그 어떤 수식어도 이 책의 기묘함을 온전히 담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됩니다.



부커상 인터내셔널 후보작, 어떤 책인가요?

부커상 인터내셔널(Booker International Prize)은 영어권 밖에서 쓰인 소설을 영어로 번역·출판한 작품에 수여하는 상입니다. 쉽게 말해 비영어권 문학이 전 세계 독자와 만나는 가장 권위 있는 관문 중 하나로, 이 후보에 오른다는 것 자체가 세계 문학 시장에서 이미 눈도장을 찍었다는 뜻입니다. 《저주토끼》는 2022년 이 부문 최종 후보(Shortlist)에 이름을 올렸습니다(출처: The Booker Prizes).

솔직히 처음 이 책을 집었을 때 저는 반신반의했습니다. 부커상 후보라는 말에 왠지 묵직하고 난해한 문학 소설을 상상했거든요. 그런데 막상 첫 단편 〈저주토끼〉를 펼치자 예상이 빗나갔습니다. 도입부는 가업으로 저주 용품을 만드는 집안 이야기였고, 그 설정이 어찌나 자연스럽게 쓰여 있던지 처음에는 그게 이상한 상황인지도 몰랐습니다.

2023년 인플루엔셜 문학 브랜드 '래빗홀'에서 내놓은 전면 개정판은 단순한 오탈자 수정이 아닙니다. 표제작 〈저주토끼〉의 결말을 최초 창작 버전으로 되돌렸고, 인물 간 말투와 외국어 표기, 혼재되어 있던 명칭까지 전반적으로 다듬었습니다. 작가가 처음에 쓰고 싶었던 날카로운 분노, 어디에도 기댈 곳 없는 사람들의 맥락이 더 선명하게 살아났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요약: 《저주토끼》는 부커상 인터내셔널 최종 후보에 오른 작품으로, 2023년 전면 개정판에서 표제작의 최초 창작 버전이 복원되었습니다.

 

작용과 반작용, 10편 이야기가 말하는 것

정보라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이 소설집의 복수 서사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복수라기보다는 작용과 반작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행하는 모든 작용에는 크기는 같고 방향은 반대인 반작용이 언제나 반드시 수반될 것입니다." 물리학에서 빌려온 이 개념을 인간 관계에 적용하면, 가해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돌려받는다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제가 읽으면서 가장 불편했던 지점은 바로 여기였습니다. 복수가 완수되어도 아무도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것. 경쟁사를 무너뜨리려 악성 루머를 퍼뜨린 양조 회사 사장도, 욕심 때문에 가족을 파멸로 이끈 남자도 결국 극단적인 파멸에 이르기는 합니다. 통쾌하냐고요? 일순간은 그렇습니다. 하지만 상처받은 이들의 회복은 담보되지 않습니다. 징벌은 자업자득의 결과물일 뿐이고, 폭력은 다시 또 다른 반작용의 씨앗이 됩니다.

수록된 단편 10편의 제목을 나열하면 이렇습니다.

  • 저주토끼
  • 머리
  • 차가운 손가락
  • 몸하다
  • 안녕, 내 사랑
  • 흉터
  • 즐거운 나의 집
  • 바람과 모래의 지배자
  • 재회

제목만 봐서는 어떤 이야기일지 전혀 예측이 되지 않습니다. 이게 이 소설집의 매력이기도 합니다. 각각의 단편은 서로 연결되지 않고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만, 읽고 나서 돌아보면 전부 '작용과 반작용'이라는 하나의 실로 꿰어져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제가 직접 한 편씩 읽어보니 그 구조가 생각보다 훨씬 촘촘하게 설계되어 있었습니다.

요약: 복수와 파멸의 서사가 반복되지만, 결국 상처받은 이의 회복은 없다는 것이 이 소설집의 냉혹한 핵심입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단편 <머리> — 무관심이 부른 파국

10편 중 제가 가장 오래 머릿속에 남겨두게 된 단편은 〈머리〉였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느 날 한 여자가 화장실에서 물을 내리려는데 변기 속에서 머리가 하나 나타나 "어머니"라고 부릅니다. 여자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립니다. 그런데 반응이 기가 막힙니다.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닌데 뭐가 문제냐는 식입니다. 세월이 흘러 머리는 자라나고, 결국 늙은 여자를 변기 속으로 끌어넣습니다.

팬텀(phantom) 서사, 즉 눈에는 보이지만 실체가 불분명한 존재가 현실에 침투하는 이 구조는 호러 장르의 오랜 문법입니다. 여기서 팬텀 서사란 초자연적 존재가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공포를 증폭시키는 이야기 방식을 뜻합니다. 그런데 정보라는 이 형식을 비틀어서 공포의 원천을 '머리' 그 자체가 아니라 주변인들의 무관심으로 돌려버립니다. 귀신보다 무서운 건 사람들의 외면이라는 것, '머리'가 여자를 집어삼키는 장면보다, 아무도 여자의 말을 진지하게 듣지 않았다는 사실이 훨씬 더 오래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 무관심이라는 작용이 여자의 죽음이라는 반작용을 불렀고, 이제 그 죽음이 남은 사람들에게 어떤 반작용을 일으킬지, 책을 덮고도 한참을 상상하게 됩니다.

요약: 〈머리〉는 초자연적 존재보다 주변인들의 무관심이 더 큰 공포임을 보여주는 단편으로, 이 소설집의 작용·반작용 구조를 가장 직접적으로 체감하게 해줍니다.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책, 그럼에도 읽어야 할 이유

《저주토끼》는 분명 모두를 위한 책이 아닙니다. 제가 직접 읽어보니 서사적 개연성보다 감각적인 충격이나 여운을 중시하는 문체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소재가 불편할 수도 있습니다. 이야기가 끝나는 방식이 납득이 아니라 당혹으로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이게 왜 이렇게 끝나지?" 싶은 순간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당혹스러운 여백이 오히려 이 소설집의 강점이라고 봅니다. 결말이 열려 있기 때문에 독자마다 다른 이야기를 읽고 나옵니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이 소설집이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적 폭력을 환상호러(dark fantasy)라는 장르 문법 안에 녹여낸다는 것입니다. 환상호러란 현실과 비현실이 충돌하는 공간에서 인간의 공포와 욕망을 탐구하는 장르를 의미합니다. 〈몸하다〉의 의사 권력, 〈즐거운 나의 집〉의 위선적인 남편, 〈바람과 모래의 지배자〉의 공주가 거절하는 영생의 프로포즈, 이 모든 장면들이 현실의 구조적 문제를 기괴한 장치를 통해 드러냅니다. 읽으면서 불편한 건 소설이 낯설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익숙한 현실을 비추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 읽는 분이라면 저는 표제작 〈저주토끼〉부터 시작하시길 권합니다. 다른 단편에 비해 상대적으로 이야기의 진입 장벽이 낮고, 이 책이 어떤 방식으로 독자를 낚아채는지 가장 잘 보여주는 단편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금씩 녹아들다 보면 어느새 〈머리〉의 변기를 걱정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요약: 개연성보다 여운을 중시하는 구조로 호불호가 갈릴 수 있지만, 환상호러 장르를 통해 현실의 폭력을 정밀하게 짚어내는 소설집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저주토끼 개정판은 초판이랑 뭐가 다른가요?

A. 가장 큰 차이는 표제작 〈저주토끼〉의 결말 부분을 작가의 최초 창작 버전으로 되돌린 것입니다. 날카로운 분노와 어디에도 기댈 곳 없는 인물들의 맥락이 더 선명하게 살아난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외국어 표기, 인물 간 말투, 혼재되어 있던 명칭과 부정확한 표현 등을 전반적으로 수정 보완했습니다.

 

Q. 무서움을 잘 못 타는데도 읽을 수 있을까요?

A. 저도 비슷한 고민을 했는데, 귀신이 튀어나오는 영화 스타일의 공포라기보다는 '읽고 나서 뒷맛이 묘하게 남는' 종류의 소름입니다. 잠을 못 잘 정도로 무서운 단편도 일부 있다는 평이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호러보다 기묘한 분위기에 가깝습니다. 가장 부담 없는 〈저주토끼〉부터 시작해 보시면 감이 오실 겁니다. 다만 소재의 불편함은 있을 수 있습니다.

 

Q. 단편집이라서 이야기가 연결이 안 되지 않나요?

A. 각 단편은 서로 다른 세계관과 인물을 가지고 독립적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읽다 보면 '작용과 반작용'이라는 하나의 주제 의식이 전편을 관통한다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연속된 이야기를 기대하면 당황할 수 있지만, 단편 특유의 밀도와 여운을 즐기는 분이라면 오히려 한 편 한 편이 독립적인 것이 장점으로 느껴질 겁니다.

 

Q. 부커상 인터내셔널 후보에 오른 한국 소설이 또 있나요?

A. 한국 소설은 최근 세계 문학 시장에서 꾸준히 주목받고 있습니다.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가 2016년 부커상 인터내셔널을 수상한 바 있으며, 이후 여러 한국 작가들의 작품이 후보에 오르는 흐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저주토끼》는 그 흐름 속에서 특히 장르 문학으로 후보에 올랐다는 점에서 의미가 다릅니다.

 

결론

《저주토끼》를 다 읽고 나서 제가 내린 결론은 이렇습니다. 이 책은 '예쁜 소설'이 아닙니다. 위로도 명쾌한 해답도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불편함이 오히려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작가의 말처럼 이 책은 교훈을 전달하려는 소설이 아니라 즐거움을 위한 환상호러 단편집이지만, 읽고 나면 자신도 모르게 어떤 생각들이 쌓여 있습니다.

정보라 작가의 상상력이 어디까지 닿아 있는지 궁금하신 분, 현실의 구조적 불편함을 기괴한 이야기로 비틀어 보고 싶은 분이라면 이 소설집이 꽤 오래 머릿속에 남을 것 같습니다.

참고: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01465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