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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냉장고 과일을 방치하다 꺼내보면 이미 그 안에서 조용히 무너져 있습니다. 사올 때의 싱싱함은 흔적도 없고, 만지는 순간 손 안에서 물컹하게 흘러내립니다. 냉장고에서 보던 이 장면이 구병모의 소설 《파과》를 읽으면서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 소설은 바로 그 찰나, 부서지기 직전의 것들이 오히려 가장 강하게 빛나는 순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노화 서사 — 퇴물이 된 킬러가 건드리는 것들

솔직히 이 소설을 처음 접했을 때, 65세 여성 청부 살인업자라는 설정이 얼마나 설득력 있게 굴러갈 수 있을지 반신반의했습니다. 노인, 여성, 킬러. 이 세 단어를 한 인물에 붙이는 것 자체가 한국 소설에서는 거의 전례가 없는 시도입니다. 주인공 조각(爪角)은 40여 년간 '방역 작업'이라는 이름으로 청부 살인을 수행해온 인물인데, 소설이 시작될 무렵 그녀의 몸과 기억은 이미 삐걱거리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노화 서사란 단순히 늙어가는 신체를 묘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물이 나이 들면서 세계를 감각하는 방식 자체가 달라지고, 그것이 서사의 핵심 동력이 되는 구조를 의미합니다. 구병모는 조각의 노화를 통해 이 효과를 정밀하게 구현합니다. 기억이 뭉개지고, 반사 신경이 느려지고, 한때 '손톱'이라 불리던 그녀는 조직 내에서 퇴물 취급을 받습니다.

저도 10대, 20대, 30대를 지나오면서 생각하는 방식이 확연히 달라지는 걸 느꼈습니다. 몰랐던 취향을 알게 되고, 열정적으로 좋아했던 것을 어느 순간 내려놓고, 한때 독했던 마음이 무뎌지기도 합니다. 조각이 경험하는 것은 그 연장선에 있는 변화이되, 그 직업이 청부 살인업자라는 극단적 설정 덕분에 노화의 무게가 훨씬 날카롭게 전달됩니다.

특히 소설의 첫 장면, 지하철에서 빌런을 처치하는 시퀀스는 이 소설의 매력을 단번에 드러냅니다. 평범한 공간에서 평범한 사람이 갑자기 죽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공포로 다가오지 않고 묘한 해방감과 함께 읽힙니다. 저는 거기서부터 이 소설에 완전히 끌려들어 갔습니다. 원래 그 빌런짓으로 죽을 사람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통쾌했고, 그 통쾌함이 뒤에 남기는 불편함까지 소설은 정직하게 짚어냅니다.

  • 조각은 노화와 함께 타인의 공허와 슬픔을 처음으로 '보기' 시작합니다
  • 버려진 늙은 개 '무용'을 데려오는 행동은 지켜야 할 것을 만들지 않겠다는 평생의 원칙을 스스로 깨는 결정적 균열입니다
  • 강 박사에 대한 감정, 투우와의 갈등은 조각이 '현재멈춤형' 삶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 뉴욕타임스 선정 '주목할 만한 책 100선'에 오른 작품으로, 전 세계 13개국에 수출되었습니다 (출처: 교보문고 도서 상세)
요약: 65세 여성 킬러라는 파격적 설정을 통해, 구병모는 노화 서사를 단순한 쇠퇴가 아닌 감각의 확장으로 그려냅니다.

현재멈춤형과 파과의 의미 — 부서지기 때문에 빛난다

소설 안에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방역업을 시작한 뒤 조각의 삶은 '현재진행형'이 아닌 '현재멈춤형'이었다는 것입니다. 현재멈춤형이란 제가 처음 이 대목을 읽으며 한참 멈추게 만든 표현인데, 앞날에 대한 기대도 소망도 없이, 맥박이 멈추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움직이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살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아직 죽지 않았기 때문에 움직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앞으로 나아간다'는 진행형을 살아 있음의 증거로 여기는데, 조각은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나이 들어 마음이 약해지고 강아지 무용 등과 관계가 생겨나면서 그녀의 삶이 다시 현재진행형으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늙는 것이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만큼 나쁘기만 한 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여기서 들었습니다.

'파과(破果)'와 '파과(破瓜)'라는 두 단어는 이 소설의 핵심 개념입니다. 파과(破果)란 부서진 과일, 흠집 난 과실을 뜻하고, 파과(破瓜)는 여자 나이 16세를 가리키는 말로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같은 발음의 두 한자어가 '소멸'과 '절정'을 동시에 가리킨다는 겁니다. 구병모는 이 언어적 이중성을 소설 전체의 구조로 삼았습니다.

이 구조는 생각보다 훨씬 강력하게 작동합니다. 냉장고에 방치된 복숭아를 버리려다 손안에서 무너져 내리는 그 장면에서 조각이 눈물을 흘리는 이유가 처음엔 이해가 잘 안 됐습니다. 그런데 읽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달콤하고 상쾌하며 부드러운 시절을 잊은 것들에 대한 연민이었다는 걸. 과일이 복숭아이기 이전에, 그건 조각 자신의 이야기였습니다.

돈은 아무리 꾸겨지고 찢어져도 만 원은 만 원입니다. 가치가 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생명은 다릅니다. 변하고, 부서지고, 사라집니다. 저는 그게 두려움의 근원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소설을 읽고 나서는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빛나는 순간이 생긴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습니다. 소설에서도 이렇게 씁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 번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고.

베를린영화제 공식 초청작으로도 제작된 만큼 이 소설의 영상화 가능성은 일찍부터 주목받았는데(출처: 베를린국제영화제), 영화판은 소설에서 조각과 류, 투우, 강 선생의 관계망을 중심으로 엮어가는 구조와 달리, 거의 조각과 투우의 관계성 하나로 이야기를 압축합니다. 소설을 먼저 읽은 저로서는 영화가 서사의 층위를 많이 걷어낸 느낌이었고, 그래서 소설을 먼저 보기를 권하는 쪽입니다.

요약: '현재멈춤형'에서 다시 '현재진행형'으로 돌아오는 조각의 여정은, 부서지기 때문에 빛난다는 파과의 이중 의미를 정확히 구현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파과 소설 어렵지 않나요? 장르가 뭔가요?

A. 문체가 다소 문학적이긴 하지만 구성 자체는 스릴러에 가깝습니다. 킬러가 등장하고 총격전으로 절정을 맞는 구조라 장르 소설로도 충분히 읽힙니다. 전반부의 지하철 장면부터 속도감이 붙기 때문에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진입할 수 있습니다.


Q. 파과 소설이랑 영화 중 뭘 먼저 봐야 하나요?

A. 제 경험상 소설을 먼저 읽는 쪽이 훨씬 풍부합니다. 소설은 조각과 류, 투우, 강 선생의 관계가 입체적으로 교차하는 반면, 영화는 조각과 투우의 대결 구도로 좁혀져 있습니다.


Q. 파과(破果)와 파과(破瓜) 차이가 뭔가요?

A. 발음은 같지만 의미가 정반대입니다. 파과(破果)는 부서진 과일, 흠집 난 것을 뜻하고, 파과(破瓜)는 여자 나이 16세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절정을 의미합니다. 소설은 이 두 단어의 충돌, 즉 소멸과 절정이 사실 같은 순간임을 말하기 위해 제목으로 이 이중성을 선택했습니다.


Q. 구병모 작가 다른 책도 비슷한 스타일인가요?

A. 구병모는 《아가미》에서 아가미를 가진 소년, 《한 스푼의 시간》에서 인간을 닮은 로봇을 주인공으로 삼는 등 환상적 설정을 즐겨 사용합니다. 다만 《파과》는 그중에서도 가장 현실 밀착적인 편이라, 구병모 입문작으로 오히려 적합하다고 봅니다.


결론

《파과》는 단순히 '여성 킬러 소설'로 소비되기엔 아까운 작품입니다. 저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이 드는 것, 변하는 것, 지켜야 할 것이 생기는 것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됐습니다. 특히 '현재멈춤형'이라는 표현과 냉장고 속 무너진 복숭아 장면은, 읽고 나서도 한참 떠오릅니다.

리커버판 표지의 자수 작품처럼, 이 소설도 한 땀 한 땀 공들인 문장들이 쌓여 만들어진 세계입니다. 나이 드는 것이 두렵거나, 무언가를 잃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시기에 읽으면 더 크게 다가올 소설입니다. 소설을 먼저 읽고 영화를 보는 순서를 권합니다.

참고: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8086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