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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솔직히 저는 1915년에 쓰인 소설이 이렇게 읽힐 줄 몰랐습니다. 100년이 넘은 첩보소설이라길래 시대적 한계가 클 거라 지레 짐작했는데, 막상 펼쳐보니 짧은 영화 한 편을 본 기분이었습니다. 존 버컨의 『39계단』,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마지막 장을 덮게 만드는 소설입니다.
1910년대 배경 — 이 소설이 태어난 맥락
『39계단』이 출판된 1915년은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시기입니다. 저자 존 버컨(John Buchan, 1875~1940)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작가이자 실제 정치인이었는데, 이 배경이 소설 전체에 짙게 깔려 있습니다. 단순한 모험담이 아니라, 유럽 열강 간의 첩보전이라는 실제 역사적 맥락 위에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여기서 첩보전이란 국가 기밀을 탈취하거나 적의 정보망을 교란하는 비밀 작전 전반을 가리키는 말로, 당시 실제 전쟁터만큼이나 치열했던 보이지 않는 전쟁입니다.
주인공 리처드 해니는 지루함에 찌든 채 런던으로 돌아온 남자입니다. 그는 아프리카 불라와요에서 성공을 거두고 영국으로 귀환했지만, 런던의 일상은 탄산이 빠진 음료처럼 밍밍합니다. 제가 이 도입부를 읽으면서 묘하게 공감했던 건, 해니의 권태감이 단순한 심심함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잃은 사람의 감각에 가깝게 묘사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우연히 만난 낯선 남자로부터 거대한 지하 조직과 유럽을 전쟁으로 끌어들이려는 음모를 듣게 됩니다. 내러티브 장치로 보면, 이 '우연한 만남'은 평범한 인물을 비범한 사건 속으로 끌어들이는 고전적인 기법입니다. 여기서 내러티브 장치란 이야기 전개를 자연스럽게 이끌기 위해 작가가 사용하는 구성 요소를 뜻합니다. 이후 해니는 살인 누명과 스파이 조직의 추격을 동시에 받으며 런던에서 스코틀랜드의 황량한 고원까지 도주를 시작합니다.
첩보소설로서의 『39계단』 — 믿을 수 있는 주인공인가
솔직히 말하면, 저는 소설 중반까지 리처드 해니를 완전히 믿지 못했습니다. '이 사람 혹시 과대망상증 아닐까?' 하는 의심이 계속 들었거든요. 과대망상증이란 자신이 실제보다 훨씬 중요한 사건의 중심에 있다고 믿는 심리 상태를 말하는데, 해니의 상황이 딱 그렇게 읽혔습니다. 지나가던 낯선 남자의 이야기를 믿고 나라를 구하러 뛰어든다는 설정이 처음엔 지나치게 작위적으로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그는 과대망상증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니의 활약이 공허하게 느껴지진 않았습니다. 해니의 감정과 행동들이 세세하게 묘사되어있고, 또한 결정적인 장면에서 그가 독일 스파이를 가려내는 방법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조차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사소한 무의식적 습, 즉 손가락을 두드리는 작은 버릇 하나를 단서로 반전을 만들어냅니다. 여기서 behavioral tell이란 거짓말이나 긴장 상태에서 무의식적으로 드러나는 신체적 신호를 의미합니다. 이 장면에서 저도 모르게 "그래, 바로 이거지"라며 무릎을 쳤습니다.
『39계단』을 첩보소설의 원형(prototype)으로 평가하는 시각도 있습니다. 실제로 이 작품은 후대 스파이 픽션 장르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문학 연구자들 사이에서 폭넓게 인정받고 있습니다(출처: 영국도서관(British Library)). 주인공이 쫓기면서 동시에 진실을 추적하는 이중 추격 구조는 이후 수많은 첩보물이 반복적으로 차용한 서사 공식입니다.
- 쫓기는 자가 동시에 추적자가 되는 이중 추격 구조
- 평범한 인물이 극한 상황에서 잠재력을 발휘하는 서사
- 사소한 행동 단서(behavioral tell)로 진실을 가려내는 결말
- 도시에서 황야로 이어지는 공간적 긴장감 전환
지금 이 소설을 읽는다는 것 — 고전의 가치와 한계
요즘 소설들은 호흡이 짧습니다. TMI라고 여겨지는 묘사는 과감히 잘라내고, 독자가 스스로 채워넣도록 여백을 넓히는 추세입니다. 그래서 고전 스릴러를 펼치면 첫 몇 페이지에서 이미 지쳐버리는 경험, 저도 여러 번 했습니다. 문장이 길고, 배경 설명이 넘쳐나고, 사건은 좀처럼 시작되지 않는 구조 때문입니다.『39계단』을 들기 전에도 솔직히 걱정이 앞섰습니다. 처음엔 이 호흡이 버겁게 느껴질 수 있는 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초반의 느린 호흡을 버티고 나면, 스코틀랜드 고원의 황량한 풍경과 해니의 긴박한 도주가 머릿속에 고화질로 펼쳐집니다. 현대 소설이 생략으로 독자를 끌어당긴다면, 존 버컨은 축적으로 긴장을 만드는 작가입니다. 플롯 구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 소설은 복잡한 복선을 자연스럽게 심어두고 마지막에 한꺼번에 수확하는 방식을 취합니다. 플롯 구성이란 이야기의 사건들을 독자가 납득할 수 있는 순서와 논리로 배열하는 기술을 말합니다.
한 가지 솔직한 아쉬움은 해니의 능력에 대한 개연성입니다. 어린 시절 007 시리즈를 보면서 첩보원의 삶을 동경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따져보면 스파이가 되려면 언어 능력, 연기력, 기억력, 체력을 모두 갖춰야 합니다. 저는 그 목록을 훑어보다 조용히 꿈을 접었는데, 해니는 그 모든 것을 타고난 듯 해내고 맙니다. 이런 캐릭터 설정을 두고 "슈퍼맨 주인공 문제"라고 보는 시각도 있고, 반대로 "장르 소설의 매력이 바로 그것"이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저는 두 의견 모두 이해하면서도, 개인적으로는 해니가 한두 번쯤 진짜 실패하는 장면이 있었다면 더 오래 기억에 남았을 것 같습니다.
고전 문학의 가치를 다루는 연구들에서도 이 소설은 장르 소설의 초기 형태를 정립한 작품으로 꾸준히 언급됩니다. 장르 소설이란 추리, 스릴러, 로맨스처럼 특정 공식과 독자 기대를 공유하는 문학 범주를 가리킵니다(출처: 프로젝트 구텐베르크(Project Gutenberg) — 『39계단』 원문). 100년이 지나도 읽히는 이유가 단순한 재미 이상의 구조적 완성도에 있다는 것, 이건 저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39계단』 읽기 어렵지 않나요? 고전이라 문체가 딱딱할 것 같은데요.
A. 고전이라 어려울 거라고 지레 겁먹는 분들도 계신데, 제가 직접 읽어보니 생각보다 술술 읽힙니다. 다만 요즘 소설에 익숙하다면 초반 묘사가 다소 길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100페이지를 넘기면 추격의 긴장감이 올라오면서 자연스럽게 페이지가 넘어갑니다.
Q. '39계단'이 제목인데, 실제로 계단이 등장하나요?
A. 네, 실제로 소설 후반부에 계단이 등장합니다. 계단의 숫자가 암호처럼 작동하는 장면인데, 이 설정에 대해 "너무 단순하다"는 시각도 있고, "그 단순함이 오히려 인상적"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저는 결말에서 그 단서가 드러나는 순간이 꽤 기분 좋은 반전이었습니다.
Q. 알프레드 히치콕 영화 『39계단』과 소설이 많이 다른가요?
A. 상당히 다릅니다. 히치콕은 원작의 뼈대만 가져오고 인물 관계와 사건을 대폭 바꿨습니다. 원작을 먼저 읽은 입장에서 보면 영화가 훨씬 가볍고 로맨틱하게 재해석되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두 작품을 비교해서 보면 각색이 원작의 어떤 요소를 살리고 버리는지 보이는 재미가 있습니다.
Q. 첩보소설 처음 읽는 사람에게도 추천할 만한가요?
A. 충분히 추천할 수 있습니다. 분량이 길지 않아 부담이 적고, 이야기의 구조 자체가 첩보 장르의 기본기를 충실히 담고 있습니다. 다만 심리전이나 세계관의 디테일보다는 추격과 위장이라는 단순하고 명쾌한 재미를 기대하고 읽는 것이 맞습니다.
결론
『39계단』을 다 읽고 나서 리처드 해니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은 기분이었습니다. 망상일 수도 있다는 의심 속에서도 끝까지 신념을 잃지 않고 행동해서 결국 옳았음을 증명하는 인물이니까요. 주인공의 능력치가 지나치게 높아 개연성이 아쉬운 부분은 분명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100년을 넘어 지금까지 읽히는 건 단순히 재미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첩보소설이나 고전에 막연한 거리감을 느끼는 분이라면, 얇고 빠른 이 소설부터 시작해보시는 것도 좋은 선택일 수 있습니다. 제가 그랬던 것처럼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마지막 장을 덮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