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냉장고 과일을 방치하다 꺼내보면 이미 그 안에서 조용히 무너져 있습니다. 사올 때의 싱싱함은 흔적도 없고, 만지는 순간 손 안에서 물컹하게 흘러내립니다. 냉장고에서 보던 이 장면이 구병모의 소설 《파과》를 읽으면서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 소설은 바로 그 찰나, 부서지기 직전의 것들이 오히려 가장 강하게 빛나는 순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노화 서사 — 퇴물이 된 킬러가 건드리는 것들솔직히 이 소설을 처음 접했을 때, 65세 여성 청부 살인업자라는 설정이 얼마나 설득력 있게 굴러갈 수 있을지 반신반의했습니다. 노인, 여성, 킬러. 이 세 단어를 한 인물에 붙이는 것 자체가 한국 소설에서는 거의 전례가 없는 시도입니다. 주인공 조각(爪角)은 40여 년간 '방역 작업..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죽기 직전 연결된 신이 첫 마디로 꺼낸 건 구조 방법이 아니라 자기 과거사였습니다. 제가 이 설정을 읽었을 때 피식 웃음이 나왔는데, 그게 이 소설의 핵심이기도 했습니다.신에게도 절차가 있다 — K-오컬트와 본풀이 형식혹시 '본풀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본풀이(本풀이)란 제주 무속 신화에서 신의 내력과 탄생을 풀어내는 이야기 형식입니다. 쉽게 말해 신이 어떻게 그 신이 되었는지를 읊어주는 구술 신화인데, 굿판에서 신을 소환하려면 먼저 그 신의 내력을 읊어야 한다는 전통에서 비롯됩니다. 김해솔 작가는 이 형식을 그대로 가져와 현대 소설에 이식했습니다.『슬라임도살자 본풀이』의 화자는 본명 지장(地藏), 활동명 슬라임도살자입니다. 지장이라는 이름은 '땅에 묻는다'는 의미를 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