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재난이 오면 살고 싶지 않을 것 같다고,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이왕 망할 거면 고통 없이 확 끝나버렸으면 좋겠다고. 그런데 막상 검은 구가 골목을 굴러오는 장면을 읽는데 손이 멈췄습니다. 김이환의 《절망의 구》는 2009년 멀티문학상 수상 이후 15년 만에 영국·미국에서 번역 출간되며 다시 주목받는 소설입니다. 그 이유를 읽고 나서야 이해했습니다.불안의 은유 — 검은 구는 왜 멈추지 않는가지름 2미터, 시속 4킬로미터. 사람이 걷는 속도보다 살짝 빠른 이 구는 절대 추적을 멈추지 않습니다. 빠르지도 않고, 그렇다고 뿌리칠 수도 없습니다. 작가 김이환은 멀티문학상 수상 소감에서 "사람들이 무언가에 쫓기지만, 공포의 정체는 찾아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고 집필 동기를 밝혔습..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전기가 사흘 동안 끊기면 그냥 불편한 정도겠지, 싶었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책을 30분쯤 읽다 보니 그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석훈 작가의 장편소설 《당인리》는 전국 대정전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통해, 우리가 얼마나 전기 하나에 모든 것을 걸고 사는지를 냉정하게 해부합니다.전국정전, 실제로 가능한 이야기인가어렸을 때 시골집에서 정전을 꽤 자주 겪었습니다. 촛불을 켜놓고 언제 불이 돌아올지 기다리던 그 시간은, 사실 그리 무섭지 않았습니다. 우리 동네만 이런 거고, 어딘가에서 수리 중이라는 믿음이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이 소설은 그 전제 자체를 무너뜨립니다. 수리해줄 곳 자체가 사라진 상황을 그리고 있으니까요.소설의 발단은 한국전력공사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가해자가 된다는 상상을 해본 적 있으십니까? 저는 장롱면허 소지자입니다. 서울 도심에서 핸들을 잡지 못하는 이유가 단순히 겁쟁이라서가 아니라, 내가 누군가를 치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입니다. 정해연 작가의 소설 『드라이브』는 그 공포를 정면으로 다룹니다. 70대 노인 운전자의 차량에 10대 소녀가 목숨을 잃는 사고. 피해자 가족과 가해자 가족, 양쪽 모두의 일상이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서늘할 만큼 세밀하게 그려낸 소설입니다.고령 운전자 사고, 예외적 사건이 아닙니다일반적으로 교통사고는 '젊은 난폭 운전자'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찾아본 통계는 꽤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교통사고 사망자 4명 중 1명이 고령 운전자가 낸..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카세트테이프가 무서울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 있으십니까? 저는 어렸을 때 자기 전에 영어 소설을 읽어주는 테이프를 틀어놓고 잠을 청하던 아이였습니다. 나른한 남자 성우의 목소리와 위잉 돌아가는 릴 소리가 백색소음이었고, 테이프 한 면이 끝날 때 탁 소리에 살짝 눈이 떠지던 기억도 생생합니다. 전건우 작가의 신작 『믹스테이프』를 읽으면서 그 기억이 제일 먼저 떠올랐습니다. 만약에 익숙한 그 탁 소리 직후에 낯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면, 저는 그날 밤 절대로 잠들지 못했을 겁니다.카세트테이프라는 매체가 왜 공포가 되는가아날로그 매체가 공포 장치로 쓰인 사례는 꽤 있습니다. 그런데 『믹스테이프』가 특별한 건 카세트테이프 특유의 물성, 그러니까 A면과 B면이라는 양면 구조 자체를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솔직히 저는 이 소설을 처음 읽기 전까지 제목만 보고 당첨자가 상품을 받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영어 제목 'The Lottery'는 복권, 당첨이라는 뜻이니까요. 그런데 마지막 장면을 읽고 나서 한동안 책을 덮지 못했습니다. 셜리 잭슨의 단편소설 「제비뽑기」는 1948년 《더 뉴요커》에 처음 실렸고, 출판 직후 엄청난 항의 편지가 쏟아졌을 만큼 강렬한 작품입니다. 짧은 단편 하나가 어떻게 이렇게 많은 것을 건드릴 수 있는지, 읽고 나서 계속 그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마을 광장의 제비뽑기, 그 잔인한 반전 구조이 소설의 배경은 미국의 이름 모를 작은 마을입니다. 인구 300명 남짓한 마을에서 매년 6월 27일, 주민 전체가 광장에 모여 제비뽑기를 거행합니다. 아이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빵인 줄 알고 먹었는데 사실 애벌레였다면, 계속 먹을 수 있을까요? 제가 이 소설을 집어 든 건 순전히 제목 때문이었습니다. '사육 준수 사항'이라는 단어가 나폴리탄 괴담처럼 느껴졌거든요. 왜 있는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규칙. 그 규칙을 어기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그 결말을 기대하며 책을 계속 읽었습니다.블랙코미디 속 현실: 빵충이라는 소재가 왜 설득력 있는가이 소설에서 '빵충'은 갓 구운 소금빵과 외형도 맛도 거의 동일한 식용 애벌레입니다. NO 밀가루에 고단백이라는 특성 덕분에 전국적인 디저트 열풍을 타고 순식간에 히트 상품이 됩니다. 황당하게 들릴 수 있는데, 소설을 읽다 보면 이게 실현 가능한 사업처럼 느껴집니다. 작가가 인디 밴드, 딸기 농가, 청..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기숙사에서 혼자 불 끄고 드라마를 보다가, 문득 제 방이 완전히 낯선 공간처럼 느껴졌던 적이 있습니다. 전건우 작가의 신작 『어두운 집』은 바로 그 감각에서 시작합니다. 그 서늘한 감각이 이 소설을 읽는 내내 계속 떠올랐습니다.도깨비터 위에 세워진 집, 그 팩트들『어두운 집』은 전건우 작가의 '어둠 3부작' 마지막 편입니다. 『어두운 물』, 『어두운 숲』에 이어 이번에는 '집'이라는 공간을 무대로 삼았습니다.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는 세 주인공, 사이코메트리 작가 민시현과 무당 윤동욱, 옥도령이 다시 등장합니다.여기서 사이코메트리란 물체나 장소에 남겨진 감정·기억을 손으로 접촉해 읽어내는 초감각적 능력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민시현은 공간에 깃든 과거의 잔상을 몸으로 직접 받아..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매주 로또를 삽니다. 당첨 확률이 814만 분의 1이라는 걸 알면서도 손이 갑니다. 가능성이 0%가 아니라는 것, 그 한 가지 이유만으로 포기가 안 됩니다. 『지옥에서의 짧은 체류』를 읽으면서 그 기분이 떠올랐습니다. 이 소설의 지옥은 불도 없고 고통도 없습니다. 대신 탈출구가 딱 하나 있고, 그 가능성이 0이 아닙니다. 그래서 더 무섭습니다.희망고문: 가능성이 0이 아닐 때 더 잔인한 이유이 소설의 지옥 탈출 조건은 단순합니다. 우주 규모의 도서관 어딘가에 꽂혀 있는, 내 인생을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기록한 단 한 권의 책을 찾아 반납 슬롯에 넣으면 됩니다. 여기서 핵심은 이 도서관이 '무한'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무한이란 끝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뜻하는데, 이 도..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귀엽다는 감각이 과연 절대적인 것일까요. 제가 어릴 때 장터에서 본 강아지는 뾰족한 주둥이에 아기 늑대 같은 얼굴이었는데, 그게 너무 귀여워서 한참을 들여다봤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설재인의 소설 『셸리 숍앤센터』를 읽고 나서야 그 감각이 얼마나 조건화된 것인지 새삼 의심하게 됐습니다. 버려진 인체 기관들을 이어 붙여 만든 반려동물 '프랑'이라는 설정은, 읽는 내내 불편하면서도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바디 호러가 불편한 이유바디 호러란 신체의 변형·훼손·해체를 공포의 핵심 기제로 삼는 장르입니다. 여기서 바디 호러란 단순히 내장이 튀어나오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당연하게 여기는 몸의 완전성과 경계가 무너지는 데서 오는 근원적 불안을 자극하는 서사 전략을 뜻..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나오키상(일본 순수문학 최고 권위의 문학상)을 수상한 추리소설이 미스터리보다 로맨스에 더 가깝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용의자 X의 헌신』은 살인사건을 다루면서도, 책을 덮은 뒤 오래도록 남는 건 트릭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었습니다.완전범죄, 수학 천재가 설계한 알리바이의 구조이 소설의 핵심은 알리바이 트릭입니다. 여기서 알리바이 트릭이란 범행 시간대에 용의자가 다른 장소에 있었음을 증명하는 장치를 말하는데, 이 소설은 그 개념 자체를 비틀어버립니다. 쉽게 말해, 경찰이 풀어야 할 문제를 처음부터 잘못 설정하도록 유도하는 방식입니다.고등학교 수학교사 이시가미는 대학 시절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라는 평을 들었던 인물입니다. 그가 설계한 알리바이는 단순히 모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