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받아 들었을 때 처음 든 생각은 "이게 책이 맞나?"였습니다. 가로 8.6cm, 세로 16.5cm. 손 안에 쥐어지는 크기가 딱 스마트폰이었거든요. 치넨 미키토의 『스와이프 엄금』은 책의 물리적 형태부터 독서 경험 자체를 완전히 바꿔놓으려는 실험작입니다. 그 실험이 성공했는지, 저는 직접 읽고 나서야 판단할 수 있었습니다.모큐멘터리 형식, 소설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스와이프 엄금』은 일본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모큐멘터리 호러 소설입니다. 모큐멘터리(Mockumentary)란, 다큐멘터리처럼 실제처럼 보이게 연출한 허구의 이야기를 말합니다. 영화에서는 관객이 "이게 진짜일 수도 있다"는 감각 때문에 더 무섭게 느끼도록 설계하는 장르 기법입니다. 이 소설은 그 감각을 종이책 위에 구현하려 했습니다.작가..
한국 귀신 서른한 종류를 한 권에 담은 책이 있습니다. 공격력·방어력·오싹력 수치까지 게임처럼 정리해놨는데, 퇴치 방법 항목에 "안타깝게 없다"고 적힌 귀신이 버젓이 실려 있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피식 웃으면서도, 어릴 때 화장실 변기에 오래 앉지 못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올라왔습니다.귀신 도감처럼 펼쳐지는 구성, 직접 읽어보니『한국귀신이야기사전』은 작가 문화류씨의 세 번째 단편집입니다. 홍콩할매, 홍대 저주 인형, 장산범, 손각시 등 서른한 종류의 귀신을 소개하고, 각 귀신에 얽힌 단편 소설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담았습니다. 여기서 옴니버스란 독립된 여러 이야기를 하나의 책 안에 묶은 구성 방식을 의미합니다. 각 에피소드가 연결되지 않아 어느 순서로 읽어도 무방하고, 출퇴근길 짬짬이 한 편씩 꺼내 읽기..
화장실에서 물을 내리는데 변기 속에서 누군가 말을 건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는 이 장면을 읽고 나서 의식적으로 며칠간 변기 뚜껑을 닫아두었습니다. 정보라의 소설집 《저주토끼》는 그런 책입니다. 2022년 부커상 인터내셔널 최종 후보에 오른 데다 전 세계 20개국에 번역 계약이 맺어진, 숫자만 보면 화려한 이력이지만 실제로 읽어보면 그 어떤 수식어도 이 책의 기묘함을 온전히 담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됩니다.부커상 인터내셔널 후보작, 어떤 책인가요?부커상 인터내셔널(Booker International Prize)은 영어권 밖에서 쓰인 소설을 영어로 번역·출판한 작품에 수여하는 상입니다. 쉽게 말해 비영어권 문학이 전 세계 독자와 만나는 가장 권위 있는 관문 중 하나로, 이 후보에 오른다는 것 자체가 세..
숲은 힐링의 공간이라고들 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전건우의 신작 《어두운 숲》을 읽고 나서, 저는 숲에 대한 그 통념을 완전히 뒤집게 됐습니다. 일반적으로 산과 숲은 한국인에게 친숙하고 편안한 공간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 소설 속 '어두운 숲'은 랜턴 하나로도 밝힐 수 없는 어둠이 도사리는 곳입니다. 전작 《어두운 물》을 재밌게 읽었던 터라 주저 없이 집어 들었습니다.고스트 투어, 왜 굳이 거기를 가는가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설마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겠어'라고 생각합니다. 공포 영화를 볼 때도, 귀신 나온다는 장소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도, 그 죽음과 공포는 어디까지나 '남의 일'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죠. 제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느낀 것도 바로 그 지점이었습니다. 주인공 민시현이 고..
바다에서 구명조끼를 입고 한참 수영하다 문득 발밑을 내려다본 적이 있습니다. 생각보다 훨씬 깊은 물속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전건우 작가의 『어두운 물』을 읽으면서 그 기억이 고스란히 되살아났습니다. 수귀(水鬼)라는 소재를 단순한 귀신 이야기로 끝내지 않고, 인간의 어두운 본성까지 파고드는 정통 K-호러입니다.강물이 품은 이야기 — 수귀 전설과 소설의 배경혹시 물에서 느끼는 공포가 단순히 깊이 때문만은 아니라고 느껴본 적 있으신가요? 저는 구명조끼를 입고 바다 위에 둥둥 떠 있을 때, 내 발밑이 어느 정도인지 감각을 완전히 잃는 느낌이 꽤 오래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구명조끼덕분에 안전하다는 것을 알지만, 어딘가 계속 불안해지는 그 감각이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따라붙었습니다.『어..
살면서 한 번쯤은 빌어봤을 겁니다. 남이 시험을 조금 못 봤으면, 저 사람만 아니었으면 하는 그 작고 은밀한 마음. 유은정 감독의 첫 장편소설 《불행소원》은 바로 그 마음에서 출발합니다. 아티스틱 스위밍을 소재로 한 하이틴 웨트 호러로, 저는 읽는 내내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계속 묻게 됐습니다.불행소원이란 무엇인가 — 저도 처음엔 믿지 않았습니다 소설 속 '불행소원'의 룰은 단순합니다. 어떤 수영장 물을 그릇에 담을 때 타인의 불행에 대한 소원을 빌고, 그 물을 누군가의 몸이나 물건에 묻히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행복을 비는 건 허락되지 않습니다. 오직 타인의 불행만이 유효합니다.여기서 핵심 개념이 등장합니다. 바로 '웨트 호러(Wet Horror)'입니다. 웨트 호러란 물을 공포..
정해연 작가의 장편 미스터리 『홍학의 자리』는 불륜과 살인, 그리고 독자 자신의 편견을 정면으로 겨냥하는 소설입니다. 스포가 포함된 리뷰이니, 먼저 읽고 오실 것을 강하게 권합니다.반전 미스터리의 구조, 그리고 이 소설이 특별한 이유『홍학의 자리』는 프롤로그부터 범인을 보여줍니다. 한 남자가 사체를 호수에 유기하는 장면으로 문을 열고, "그런데, 다현은 누가 죽였을까?"라는 한 문장으로 프롤로그를 닫습니다. 제가 처음 이 도입을 읽었을 때 든 생각은 "어, 범인이 이미 나왔는데 이게 미스터리가 될 수 있나?"였습니다. 그런데 그게 이 소설의 전략이었습니다.총 21개의 챕터로 구성된 이 작품은 왓더닛(whodunit) 방식을 비틀어 사용합니다. 왓더닛이란 "누가 했는가"를 핵심 질문으로 삼는 추리 서사 구..
세스지의 데뷔작 『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 일본에서 출간 즉시 30만 부를 돌파하고 한국에 상륙한 이 책의 정체를 제가 직접 읽으면서 느낀 대로 풀어보겠습니다.모큐멘터리란 무엇인가, 그리고 이 소설이 특별한 이유혹시 "모큐멘터리(Mockumentary)"라는 장르를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모큐멘터리란 허구의 이야기를 마치 실제 다큐멘터리처럼 연출하는 기법을 말합니다. 즉, 꾸며낸 이야기임에도 인터뷰 영상, 문서 자료, 증언 형식을 빌려 현실감을 극대화하는 방식입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주로 쓰이던 이 기법을 소설에 이식했다는 점이 이 책을 처음 봤을 때 가장 흥미로웠습니다.『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는 잡지 기사, 인터넷 커뮤니티 글, 목격자 인터뷰, 독자 제보 등을 시간 순서와 무관..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어디서부터가 꿈이었을까'라는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거든요. 전건우 작가의 신작 《굿나이트메어》는 디지털 치료제(DTx)라는 현실 속 기술을 배경으로, 치료와 공포의 경계가 얼마나 얇은지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심리 스릴러입니다. 유령도, 살인마도 없는데 읽는 내내 등골이 서늘했습니다. 디지털 치료제, 이게 정말 치료일까요?소설을 읽기 전에 디지털 치료제(DTx, Digital Therapeutics)라는 개념을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여기서 DTx란 소프트웨어·앱·콘텐츠를 통해 질병을 예방하거나 치료하는 디지털 기반 의료 행위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알약 대신 앱이 처방되는 시대가 이미 열리고 있다는 겁니다. 실제로 미국 FDA는 201..
저주 전파 — 행운의 편지와 흉담의 구조제가 초등학생 때 행운의 편지라는 게 유행했습니다. "이 편지는 영국에서 최초로 시작되어…"로 시작하는 그 편지는 일주일 안에 7명에게 전달하지 않으면 불행이 찾아온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받는 순간 이미 불편했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결국 친구들에게 넘기게 되는 구조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저주의 기본 작동 방식이었습니다.《흉담》의 핵심 설정도 동일한 논리 위에 서 있습니다. 자정까지 두 사람에게 흉담을 전달하지 않으면 악귀가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저주의 전파 메커니즘입니다. 메커니즘(mechanism)이란 어떤 현상이 작동하는 구체적인 원리를 뜻하는데, 흉담의 경우 두려움 자체가 전파를 유도하는 장치로 작동합니다. 무서우면 퍼뜨리고 싶어지고..

